길거리 나선다고 조합원에 돌아오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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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2월 조용하던 포스코가 발칵 뒤집혔다. 계열사인 삼정피앤에이(철강포장업)에 노조가 설립됐다. 비노조를 지향하던 포스코는 충격을 받았다. 그 해 4월 우려하던 사태가 터졌다. 파업이 발생했다. 포스코에서 생산한 철강이 포장이 되지 않아 포스코도 큰 타격을 입었다. 파업은 3일만에 끝났지만 그 파급 효과는 포항 지역을 뒤흔들었다. 여기저기서 분규가 일어났다. 이후 삼정피앤에이 노조에는 ‘포항 지역 맹주’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 해 7월 추대가 아닌 정식으로 치뤄진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신엄현씨가 당선됐다. 노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신 위원장이 당선된 뒤 처음 벌인 단체협상이 대화로 타결됐다. 임기를 채운 그는 생산현장으로 돌아갔다.

현재 삼정피앤에이 노조원은 142명 뿐이다. 전체 종업원의 17%다. ‘노조 가입율이 전체 근로자의 50% 미만인 사업장은 노조의 의결만으로는 다수 근로자의 의견이 회사경영에 반영될 수 없으므로 새로운 협의기구를 구성해야 한다’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97년 노경협의회가 꾸려졌다. 신씨는 초대 근로자대표위원이 됐다.

삼정피앤에이는 2003년부터 노사문화 관련 정부포상을 휩쓸고 있다. 2003년 노사문화대상 국무총리상을 시작으로 2005년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주는 ‘보람의 일터상’, 2006년 인적자원개발 우수기관상(노동부, 교육인적자원부, 산업자원부 공동), 2006년 뉴패러다임 최우수기업상, 2007년 노사문화대상 노동부장관상, 2009년 노사한누리상(노동부) 등 거의 매년 노사문화포상의 단골손님이 됐다. 신씨는 현재 삼정피앤에이 노경협의회 의장직을 맡고 있다.

Q. 신 의장이 노조위원장이 된 뒤 노조가 확 바뀌었다. 노조가 설립된 지 몇 개월만에 그렇게 바뀔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다.

“결정적인 건 운동권에서 우리 파업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당시 운동권 학생 6명이 파업 현장에 들어와 투쟁 방법을 가르치고, 과격한 행동을 이끌었다. 당시 아무 것도 모르던 노조는 이에 호응했다. 심지어 관(棺)을 들고 출근하기도 했다. 노조를 같이 만들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동료였던 노조 간부를 설득했다. 안먹히더라. 그래서 조합원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호응해주더라. 파업이 끝난 뒤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진행했다. 조합원들이 나를 밀어줬다.”


Q. 주위 노조로부터 비난도 많이 받았을텐데.

“민주 노동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아예 대놓고 나를 공격했다. 그런데 노조가 뭔가. 조합원을 잘 챙기는 게 노조의 주된 업무아닌가. 길거리로 나가서 조합원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사 측과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니 조합원의 처우도 좋아지더라. 어려울 땐 노조가 내놓고, 경기가 좋을 땐 회사가 챙겨주는 분위기가 정착됐다. 외환위기 때는 임금을 동결하고 복리후생부문을 삭감했다. 회사는 그 이듬해 전 직원 1호봉 특별승급이라는 선물로 답해줬다 .”

Q. 4조 3교대를 하다 얼마 전 철강업계 최초로 4조 2교대제를 도입했다. 일한 뒤 3일을 쉰다고 하지만 한 번에 12시간 일하는 것에 대해 직원들이 반발하지는 않았나.

“나도, 노조도 반대했다. 그래서 한국노동연구원 산하 뉴패러다임센터에 컨설팅을 의뢰했다. 의외로 우리 회사의 특성상 4조 2교대제가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일단 시행했다. 연구결과가 그렇다면 무조건 반대하기보다 운영해보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받아들였다.”

Q. 철강업계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데.

“맞는 말이다. 그래서 노사가 협의해서 거의 자동화시켰다. 그런데 잉여인력이 생겼다. 회사가 직업훈련(1년에 160시간 의무교육)과 재충전 프로그램을 개발해 적용하면서 끌어안았다. 고용불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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