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 열며]인연 받아들이는 주체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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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불교인들은 죽지 않아도 될 석가가 죽었다고 믿는다.

석가는 부처가 돼 삶과 죽음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지만 혼자만 영원히 살아 있으면 중생들이 인생무상을 모르고 불도를 닦는데 게으름피울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죽음을 보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예수에 대해 비슷한 믿음을 갖는다.

예수에게는 죽음이 없지만 모든 사람의 죄를 녹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보였고, 며칠 뒤에 본래의 하나님 자리로 부활해 돌아갔다는 것이다.

웬만한 종교심으로는 이런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남을 위해, 그것도 가족이 아닌 인류 일반을 위해 죽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며칠전 한 버스회사 인사담당자의 자살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게 한다.

불황에 시달리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부득이 정리해고를 해야 하는데, 쫓아낼 부하 직원들을 솎아내는 일을 맡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자기의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다.

순간적인 격정에 의해 자살한 것도 아니다.

그는 평소에 태극에서 노사 공생의 원리를 찾고 그 이론을 체계화할 정도로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부도당하고, 그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준 것에 대한 죄책감에서 자살하는 기업체 사장들도 많고, 개인이 운영하는 업체가 부도를 맞아 남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이유로 구청장직을 사임한 이도 있다.

그러나 이 버스회사 간부의 죽음이 특별히 우리의 가슴을 흔든다.

그는 책임지지 않아도 될 위치에 있으면서 정리해고의 문제로 죽음까지 가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고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국민 전체가 지금 이 인사 담당자의 처지에 있다.

정리해고가 가능해야 외국기업들이 우리나라에 달러를 가지고 들어올 수 있고, 그래야 기업간의 '빅딜' 인지 뭔지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보다도 국제통화기금 (IMF) 의 도움을 받을 때 정리해고를 국가 차원에서 이미 약속했었다.

법으로 정하기 위해 노사정 (勞使政) 위원회의 모임을 갖고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은 오직 모양새나 절차의 문제일 뿐이다.

국민 전체가 이대로 앉아 망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는 명목으로,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는 사람들을 직장에서 내보내야 하는 딱한 입장에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을 자살로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안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공평한 고통분담이겠는데 이것이 어렵다.

물질적 또는 외형적 의미에서의 절대적 평등은 처음부터 없었다.

오직 상대적 평등만이 있을 뿐이다.

국민 전체가 비교적 공평하게 고통을 감내하도록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통체감 (體感) 도수는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쩌나. 국민 하나 하나가 이 난국을 건지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

객이나 구경꾼은 일이 잘되든 못되든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은 다르다.

판을 깨지 않도록 미운 사람에게 떡 한개 더 집어 줄 수도 있고, 자신만 배를 곯을 수도 있다.

양보하면서 일생을 살아온 어머니처럼 지금까지 손해를 보아온 층이 또 다시 '봉' 이 될 수도 있다.

형편이 좋아지면 다른 사람만 재미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집.동네.나라 전체를 위해 고민하는 사람은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주체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나는 며칠 전 서해 바닷가에서 음력 정월 방생 (放生) 을 했다.

세찬 바람으로 몹시 추웠다.

수백명이 바짝 몸을 붙임으로써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물론 대열의 바깥쪽에서 직풍을 받은 사람은 더 고생했다.

특별히 주체 또는 주인의식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나쁜 자리에 내가 서 있다면 그 인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바람을 피해 너나없이 이동하려 한다면 그 대열은 깨질 것이니까. 바람을 많이 받은 이에게 뜻하지 않은 이점도 있었다.

겨울 해풍의 맛을 제대로 보고 바다를 더 잘 음미한 것이다.

맛보는 만큼만 거두는 인생행로에서 말이다.

석지명 〈청계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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