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희망플러스 통장’ 역수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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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어릴 때 앓은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박경수(50·은평구 갈현2동)씨는 3월 서울시의 ‘희망플러스 통장’에 가입해 매달 10만원씩 저축하고 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박씨는 사회복지관에서 자활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독거노인에게 밑반찬을 배달하고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택배 서비스를 담당하는 것이 업무다.

이렇게 해서 버는 돈이 한 달에 65만~70만원.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지원되는 110만원의 급여를 합하면 월 평균 소득은 180만원 정도다. 이 돈으로 허리가 아파 일을 거의 못 하는 부인, 다섯 자녀와 함께 생활하기에 빠듯하다. 게다가 임대주택의 월세로 한 달에 30만원을 내야 한다. 그래서 올 초까지만 해도 저축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박씨는 “희망플러스 통장 얘기를 듣고는 꿈을 갖게 됐다”며 “3년간 열심히 저축해 꼭 전셋집으로 옮기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희망플러스 통장 사업이 1년5개월째 접어들었다. 이 사업은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 등 저소득층이 매월 5만∼20만원씩 3년간 저축하면 서울시와 후원기관이 같은 액수만큼 지원하는 것이다.

2007년 11월 100가구를 대상으로 시범 사업이 시작됐다. 먹고살기에 급급해 저축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저소득층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자는 취지에서였다. 시범 사업에 참여한 100가구 중 5월 현재 2가구만 중도 탈락했을 정도로 호응이 좋다. 시범 사업에 참여한 박성순(54·여·산후관리사)씨는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딸을 키우면서 너무 힘들었다”며 “희망플러스 통장에 참여하면서 삶의 희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올 3월 1000가구를 추가로 선발한 데 이어 올해 말까지 희망플러스 통장 가입 가구를 모두 1만 가구로 늘릴 계획이다. 서울시 김인철 복지정책과장은 “문의가 끊임없이 들어올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고 말했다.

이 사업은 미국에서 운용 중인 개인발달계좌(IDA)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IDA는 저소득층의 개인 저축에 대해 세 배까지 지원해 준다. 현재 40여 개 주에서 3만여 개의 계좌가 있다.

희망플러스 통장은 IDA에 비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접목돼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사업을 주관하는 서울복지재단은 통장 가입자를 대상으로 금융 전문가와의 일대일 상담을 통한 재무 설계는 물론 가계 부채 관리, 보험, 개인 위험 관리, 주택 정책 관련 강의를 마련해 놓고 있다.

이 사업이 자리를 잡아 가자 IDA 사업을 제안한 미국 워싱턴대(미주리주)의 마이클 시라든 교수팀에서 최근 공동 연구를 제안해 왔다. 통장 가입자를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 등 집중 조사를 한 뒤 연말에 국제 세미나를 개최해 연구 결과를 발표하자는 내용이었다. 희망플러스 통장을 외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공동 연구 협약을 위해 6일 출국한 이성규 복지재단 대표는 “한국 상황에 걸맞게 변화된 희망플러스 통장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미국 이외의 나라에도 희망플러스 통장과 유사한 제도가 있다. 영국은 ‘세이빙 게이트웨이(Saving gateway)’라는 이름으로 2002년 8월 시작했으며 정부에서 개인 저축에 대해 일대일로 매칭펀드를 지원해 준다. 캐나다와 대만도 비슷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그러나 중도 탈락률이 15~20% 선이다.

강갑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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