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일그러진 외신 재생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관치 (官治) 금융 체제의 '현금 진열대 (cash windows)' 에 불과한 은행들로부터 기업이 싸게 '무제한' 의 돈을 빌려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임원들은 회장의 아이디어를 그저 실행에 옮겼을 뿐 계획이란 것이 없었다.”

대체 어느 나라 은행.기업에 대한 이야기일까. 불행히도 한국이다.

우리가 국제통화기금 (IMF) 구제금융에 기대며 한창 경제 위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을 때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이나 워싱턴 포스트 등 세계적 권위지들이 실었던 한국 관련 기사중 몇몇 부분을 골라 이어 맞추면 위와 같은 모습이 그려진다.

외국 언론의 이같은 한국 경제 소묘 (素描)에 “맞는 말 아니냐” 며 수긍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언어의 폭력' 에 이미 길들여져 판단력을 잃은 사람이다.

심사 기능이 취약한 우리 은행들에 담보 대출 관행이 짙게 남아 있어 자산이 많고 계열사간 상호보증도 동원할 수 있는 대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은행 돈 쓰기가 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은행들이 '현금 진열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가 돼 '무제한' (워싱턴 포스트) 으로 돈을 대주었다고 하면 영판 딴 얘기가 돼 버린다.

정부가 한번 돈줄을 죄면 진열대 (?) 의 현금은커녕 급작스런 돈가뭄 현상에 예고 없는 자금난이 닥쳤고, 동일인 여신한도 등의 물리적인 대출 규제로 어렵사리 끌고 왔던 우리의 낙후된 금융.통화관리 체제를 외국 언론들이 속속들이 알았다면 이같은 기사를 썼을 리가 없다.

또 한국 기업들의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라면 몰라도, 세상에 어느 기업의 임원들이 '계획이란 것은 없이' 그저 '회장의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기만' (워싱턴 포스트) 했을까. 이같은 예는 물론 IMF 구제금융을 전후해 한국 경제 상황을 다룬 외국 언론의 기사중 일부 극단적인 경우다.

그러나 단 몇 줄이라도 이처럼 몹시 비뚤어지게 과장된 한국 경제 소묘가 외국 언론에 오르내리는 한 개별 기업.은행은 물론 한국 경제의 신인도에는 큰 상처가 팬 채 쉽게 아물 수가 없다.

임원이 계획도 세우지 않는 기업에 무제한으로 은행 돈이 흘러들어간다는 나라를 상대로 누가 투자를 하겠는가.

한국이 경제 위기에 빠져들면서 세계의 이목 (耳目) 은 많은 한국 관련 기사를 필요로 했고, 우리는 우리대로 외국 언론을 통한 해외의 시각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예컨대 워싱턴 포스트의 지난달 18일자 'IMF 체제에 대한 반발' 이란 제목의 기사는 아예 서울의 몇몇 신문들이 썼던 사설.기사.독자투고중 필요한 대목을 골라 전재했다.

IMF 체제를 '국치 (國恥)' 라고 했던 국내 신문의 1면 머릿기사 제목도 인용됐다.

국내 언론들도 고비마다 해외 언론들의 논조나 기사를 부지런히 전했다.

내외신 기사의 교류가 어느 때보다 활발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거르지 않고 전하는 정보' 나 '걸러지지 못하고 전해질 정보' 에 우리 모두가 바짝 신경을 써야만 한다.

우리가 무심코 과장해서 하는 비판이 우리의 속사정을 일일이 알 수가 없는 외국 언론에 그대로 인용되고 이것이 다시 해외의 시각으로 국내에 전해지는 '내외신의 국제적 확대 재생산' 이 우리 스스로를 해치는 경우는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기업의 지배구조나 낙후된 금융체제가 아무리 절박한 문제라 하더라도 어째서 우리가 '현금 진열대' 를 차려놓고 '임원이 계획도 세우지 않는 기업' 에 '무제한' 으로 은행 돈을 내주는 나라의 국민인가.

세계 무대에 우리가 이같은 모습으로까지 비쳐지고 그런 모습이 다시 우리에게 '자기 암시' 처럼 되돌아오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들의 책임이다.

아무리 우리가 IMF시대를 살게됐다 하더라도 우리의 자존 (自尊) 과 이익은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하지 않을까.

김수길〈워싱턴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