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팟 꿈꾸다 … 라스베이거스 ‘시궁창 인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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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는 ‘도박과 환락의 도시’로 유명하다. 그러나 지하에는 거미줄처럼 깔린 640㎞의 하수도가 있고, 몇 발자국 걸어가도 짙은 어둠만이 보인다.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곳이다. 그런데 하수도를 따라 더욱 깊숙이 가면 딸그락거리는 주방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고, 애완견이 손님을 반긴다. ‘하수도 빈민촌’이다. 이곳에 침대와 옷장, 부엌까지 마련해 두고 3년째 살고 있는 스티브(42)는 “개인용 자체 발전기가 있어 전기 조리기구로 음식도 해먹을 수 있고, 가구까지 있어 사는 데 불편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 “하수도 마을에 같이 살고 있는 내 친구만 10여 명”이라고 밝혔다.

라스베이거스는 세계 경기 침체로 올 들어 여행객이 10% 정도 줄었지만, 하수도 빈민들은 오히려 늘고 있다고 ABC 방송이 최근 보도했다. 카지노와 호텔로 불야성을 이루는 지상 세계와 달리 지하에선 암흑 생활이 펼쳐진다. 하수도 빈민들은 마약·술 중독자이거나 도박으로 돈을 날리고는 차비를 잃은 여행객이 대부분이다. 1년 미만의 단기 거주자가 상당수지만 3~4년 눌러앉은 사람들도 있다.

라스베이거스 하수도 세계의 실상을 처음 세상에 알린 사람은 이 지역 잡지인 시티라이프의 기자로 활동하던 매튜 오브라이언(38)이다. 그는 2002년부터 5년간 라스베이거스 하수도를 훑고 다니며 봤던 참상을 『네온 불빛 아래서』라는 책을 통해 소개했다.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의 최대 카지노 숙소 중 하나인 플래닛 할리우드 호텔은 무지갯빛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을 자랑한다. 그러나 호텔 밑 하수도에서는 도박 등으로 재산을 탕진한 부랑자들이 생활하고 있다. 맨 오른쪽 사진은 베트남전 참전 군인이던 마이크가 수년 전 하수도에서 생활할 때의 모습. 그는 2005년 위출혈로 여기서 생을 마감했다. [매튜 오브라이언 제공]

그는 2일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연쇄살인범이 하수도로 사라지면 경찰은 잡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2002년 처음 취재를 시작했다”며 “살인범이 나올 줄 알고 두려움에 떨었던 첫 취재에서 하수도 사람들의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됐다”고 말했다. “로마시대 지하 묘지인 카타콤에서 생활하던 그리스도인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도 했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에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며 “라스베이거스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찾아오는데, 그들이 호화 호텔 밑에서 벌어지는 비참한 삶을 보면 놀랄 것”이라고 말했다. 지상에선 무지갯빛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지만, 지하 세계에서는 하층민들이 촛불이나 전등불에 의지해 산다는 것이다.

하수도에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부랑자들은 500여 명 규모의 마을을 형성했다. 오브라이언은 “라스베이거스가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한 20년 전부터 하수도 망이 점차 확산하자 하층민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 “하수도 생활을 하는 스티브도 안정된 가정에서 자랐으나 마약 중독 때문에 결국 거리에 나앉은 후 친구의 소개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브라이언은 “2007년 이들을 땅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는 자선단체를 만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지상 세계로 복귀해도 라스베이거스의 도박과 마약의 유혹에 못 이겨 패가망신한 뒤 다시 지하세계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ABC 방송은 “올 4월 현재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약 1만5000명이 재산을 탕진해 노숙자가 된 상태”라고 보도했다. 미국 도시 중 둘째로 많은 규모다. 이 때문에 라스베이거스는 ‘악의 도시(Sin City)’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하수도 안에는 영어를 잘 할 줄 모르는 한국인도 있었다”고 전했다. 또 “서울 마포구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했던 여자친구가 한강 하수도에서 생활하는 부랑자들에 대해 전해줬다”며 “어느 대도시에 가나 하수도 안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오브라이언은 “하수도 안에 사는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찾으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고 전했다. 하수도 주변 곳곳에서 “내년에는 희망을 갖자”는 글씨와 함께 형형색색의 스프레이 그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좁은 공간에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면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기도 한다”며 “삶에 대한 의지가 스프레이 그림에 나타나 ‘지하 예술’이 된다”고 밝혔다.

김민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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