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국제채권기관도 책임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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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동남아와 한국을 휩쓴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으레 이들 경제의 고질화된 구조적 병폐와 방만한 정책운영이 거론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국제금융제도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고, 바로 이러한 취약점 때문에 태국에서 발생한 외환위기가 전염병처럼 급속히 다른 국가로 옮겨갔을 뿐만 아니라 위기가 더욱 심화됐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점으로는 외환위기가 다른 나라와 지역으로 전파되지 않도록 그 경로를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내의 어느 한 은행에서 예금인출 사태가 일어나면 중앙은행은 무한정 자금을 풀어 지급불능 사태를 막을 준비가 돼 있고, 이 때문에 예금인출이 다른 은행으로 확산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국제금융거래에 있어서도 조기대출 회수 징후가 나타난 지난해 11월의 경우 즉시 한국은행에 자금지원을 할 수 있는 국제기구가 있었거나 혹은 각국의 중앙은행간 그러한 협약이 이뤄져 있었다면 환란 (換亂) 을 면하거나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협조체제도 없고 형식적으로 최종 대부자 역할을 맡고 있는 국제통화기금 (IMF) 의 지원만으론 금융위기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많은 금융전문가들은 환율이 두배로, 금리가 세배 이상 급등하는 등 한국외환 위기의 호된 충격에 놀라고 있다.

한국경제의 구조적인 취약점이 심각했고 정책운영에 허점이 보이기는 했어도 국제수지.물가.고용 등에 문제가 있은 것도 아니었는데 어째서 국제상업은행과 외국의 투자가들은 그렇게 한꺼번에 약속이나 한 듯이 떼를 지어 떠날 수 있는가.

물론 장래의 전망이나 신용위험 등은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단기로 빌려 온 자금을 장기로 기업에 전대 (轉貸) 한 금융기관, 그리고 이러한 금융기관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정책당국에 위기의 일차적인 책임이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돈을 빌려 준 외국의 채권은행이나 기관투자가들은 무엇을 했는가.

당연히 채무자들의 신용이나 상환능력을 평가했어야 했고, 만일 신용조사를 제대로 했더라면 그렇게 많은 돈을 쉽게 빌려 주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국제금융시장의 큰손, 작은손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이처럼 파괴행위를 일삼고 있어도 국제금융에 관한 한 대형 국제상업은행.증권회사.보험회사 등 기관투자가들은 규제를 받기는커녕 누구의 감독도 받지 않고 있다.

이런 감독 부재로 이들의 대출이 방만해졌고 그 결과 금융위기가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가게 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정부로 하여금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도록 온갖 압력을 가한 것도 바로 이들 채권금융기관들이었다.

금융위기를 채무자들과 직접 협상해 해결하려 하기보다 IMF 지원을 받으면 금융면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원리금 상환 보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모두 IMF에 떠맡기기에 급급했다.

바로 이러한 도덕적 해이성이 국제금융제도의 안정성마저 위협하고 있다.

대출이나 투자를 잘 못했으면 채권자도 당연히 응분의 손해를 봐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외채상환협상에선 손해는 고사하고 이 기회를 이용해 이득을 챙기려는 경쟁마저 보이고 있다.

국가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우리가 무슨 불평을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면 할말은 없다.

그러나 국제사회 분위기는 서서히 한국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특히 위에서 지적한 국제금융제도의 모순점을 개선해야 한다는 논의가 확산되면서 그런 분위기는 더욱 더 확연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국제금융의 큰손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 국제상업.투자은행들이 자금지원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자율의 조건은 가혹할뿐만 아니라 한국의 상환능력을 완전히 무시하는 지극히 근시안적이고 단기적인 이익만 고려하는 행위라는 점은 지적돼야 한다.

이런 조건이라면 우리의 반대 주장을 분명히 해 끝까지 버텨 봐야 한다.

우리 힘만으로 버틸 수 없다면 국제 여론을 동원하고, 그것도 부족하다면 이젠 한국을 부도낼 수 없게 된 그들의 입장을 최대한 이용하는 배수 (背水) 의 진 (陣) 을 치고 고통스럽고 일견 위험해 보일지라도 끈질기게 협상을 벌여야 한다.

박영철 <고려대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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