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금리·기업 자금경색]기업실태…은행돌며 때론 협박 때론 애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건설업체인 W사의 자금담당 朴모상무는 최근 한달이상째 밤12시 이전에 퇴근해 본 적이 없다.

낮에는 은행을 돌면서 만기도래한 대출금의 기일연장을 통사정하고 다닌다.

어떤 때는 “정 그렇다면 맘대로 해봐라” 며 협박 (?) 도 한다고 한다.

저녁에는 아파트 중도금.잔금 납입상황을 체크하는 등 자금계획을 맞추다 보면 밤12시를 넘기기 일쑤다.

하지만 금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면서 중도금 대출이 막히는 바람에 돈 들어오는 구멍은 거의 막히고 나갈 구멍만 휑하니 뚫려 이래저래 골치다.

朴상무는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해가고 있지만 실세금리가 20%를 웃도는 상황이 계속되면 언제 부도가 날지 알 수 없다” 고 한숨 짓는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아야 한다.”

최근의 초고금리 상황앞에서 생존을 위한 기업들의 몸부림은 이처럼 처절하기만 하다.

기업들에 매출확대와 이윤창출은 이미 사치가 된지 오래다.

장기적인 투자및 그에 따른 자금계획은 아예 엄두도 못내고 있다.

D그룹의 자금담당 임원은 “올 1분기가 최대 고비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버티는 게 관건” 이라며 “지금 상황은 얼마나 늦게 망하느냐의 게임” 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은 초고금리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중소수출업체인 K사는 치솟는 금리에 대응하느라 임금을 삭감하고 상여금을 없앴다.

그러나 사무실 임대료도 내기 힘들게 되자 향후 2년정도 이를 임대보증금에서 까 나가기로 했다.

식품업체인 D사는 지난 한달간 평균 18.5%의 금리로 6억7천여만원의 이자를 지급했다.

이는 IMF사태 이전 자신들의 차입 금리수준 (평균 13%) 보다 2억1천여만원이 늘어난 금액이다.

이 회사는 올 한햇동안 이같은 고금리가 유지되면 20억~30억원가량 금리부담이 더 늘 것으로 본다.

연간 예상매출액 2천여억원의 10%이상을 고금리로 까먹어야할 판이다.

석유화학업체인 H사는 수출환어음 할인이 제대로 안되고 신규대출창구가 막힌 상태에서 금리만 올라가다 보니 더 이상 이를 감당할 수가 없다고 판단해 원유수입량 자체를 줄이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S상사 재무팀장은 “수출입을 통한 이익이 1~2%선에 불과한데 당좌대월 금리는 40%를 육박하는 상황에서 버틸 재간이 없다” 고 말했다.

은행에 대한 국제결제은행 (BIS) 기준이 지난해 12월말로 당겨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신규대출창구와 수출관련 금융창구는 막혀 있다.

H그룹 임원은 “은행권 신규차입이 간간이 이뤄지곤 있으나 담보를 요구하는 경우가 종전보다 더 많아져 구태의연한 대출관행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고 말했다.

이 때문에 초고금리를 불문하고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돈을 조달하고 있다.

L전자 관계자는 “단자회사나 은행신탁에서 우량기업에만 혜택을 주는 금리 35%짜리 6개월 단기자금을 끌어다쓰고 있다” 고 말했다.

섬유업체인 S사는 금리가 40%에 육박하는 당좌대월과 신탁대출을 마다하지 않고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지난해 12월부터 금융비용이 2배이상 늘었고 앞으로도 큰 짐이 될 것이지만 우선 급하기 때문에 금리를 따질 계제가 아니다” 고 밝혔다.

기계업체인 H사 자금부장은 “현재의 고금리는 정당한 이윤이 아니라 금융기관이 폭리를 취하는 셈” 이라면서 “은행영업도 공정거래차원에서 정부가 감독해야 한다” 고 지적했다.

신성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