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홍콩 페레그린증권 파산의 경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80년대말 홍콩과 영국 자본이 연합해 급성장해 왔던 홍콩 페레그린증권의 갑작스런 청산은 파생금융상품 투자실수로 망했던 영국 베어링증권의 파산을 연상시킨다.

반면 국가경제 전체를 부도위기 직전까지 몰고 가는데 주역을 한 한국의 부실종합금융사들의 처리는 이제나 저제나 시간만 죽이고 있다.

홍콩특구의 재무장관은 "페레그린사에 대한 구제는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며 구제금융을 거부했다.

우리는 부실 종금.은행이나 불법영업을 한 투신사의 처리를 늦추면서 그 명분으로 관련기업에 대한 충격 등 공공부문의 이익 때문에 파산을 못 시키는 것 같은 태도를 보여 왔다.

한마디로 영미식 부실기업처리와 동양식 온정주의의 차이다.

홍콩의 증권사 하나가 파산하는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물론 깊은 관련이 있다.

바로 우리의 부실 종금사가 페레그린을 통해 10억~20억달러를 인도네시아에 투자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지가 보도하고 있다.

우리 경제의 국제화가 얼마나 진전돼 있는지 실감나게 하는 일이다.

불행하게도 국내 언론의 추적을 안 받고 있지만 외신보도에 따르면 국내은행이 인도네시아에 빌려준 대출금이나 채권은 무려 90억달러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IMF를 비롯한 외국 금융기관에서 고금리로 지원받는 5백70억달러 구제금융의 6분의1에 해당된다.

페레그린의 파산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채권에 영향이 없는지 정부는 발표한 적도 없으니 국민은 알 길이 없다.

일본의 대장성은 일본 상업은행들의 부실여신 총규모가 76조엔 (약 9백50조원) 이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얼마 전 은행연합회가 발표한 21조엔에 비해 3배 이상 많은 규모다.

그렇다고 일본이 영국이나 홍콩처럼 깨끗하게 부실금융기관을 처리하리라고 보는 사람은 적다.

그러나 어둡다고 감추면 문제해결이 늦어진다.

정부는 당장 은행부실채권의 규모, 종금사와 투신사의 정확한 영업손실 규모부터 밝혀라. 보유외환을 얼렁뚱땅 넘기려다 덜미를 잡힌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기 바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