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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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제1장 슬픈 아침 ⑪

"형님, 어젯밤에 휴게소에 두고 온 그 차 말입니더…. " 운을 떼놓은 다음, 봉환은 말끝을 흐리며 한철규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랄까. 그도 마침 그곳에 두고 온 승용차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눈치이자, 봉환은 단도직입으로 손을 내밀었다.

"키는 가지고 있지요?" 그는 얼떨결에 바지주머니를 뒤져 키를 건네주고 말았다.

"처분이 잘 될는지 모르겠네요. " 말인즉슨 그가 나서서 차를 처분해 주겠다는 얘기였다.

낮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봉환은 정말 도깨비처럼 어떤 일에나 주저하는 법이 없는 위인 같았다.

그런 직설적인 대응이 조마조마한 가운데 통쾌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통쾌한 것도 분수를 넘치면, 독선적이고 위압적이란 자기 함정에 빠지는 것이었다.

어떤 대통령은 그것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다가 종국에 가선 고개 숙인 남자가 되지 않았던가.

하잘 것없는 중고차를 매매하는 데도 필경 당사자끼리 흥정이 있어야 할 것이고, 문서상의 절차도 있겠는데, 그것에 대한 말은 전혀 상관두지 않고 서둘러 국그릇을 비우고 난 뒤 홀연히 식당을 나가버렸다.

저 사람 정말 저렇게 만용을 부려도 되는 것일까. 한철규는 비로소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어정쩡한 자기 자신에게도 그랬고, 사려 깊지 못한 봉환에게도 그랬다.

마뜩찮은 기색을 알아챈 식당의 여자가 걱정말라고 거들었으나,치밀어 오르는 화증을 삭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를 뒤쫓아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한철규는 언제부턴가 도대체 거칠 것이 없는 그의 행동에 한풀 꺾이고 만 것이었다.

인생에 대한 냉정한 통찰력을 가진 소유자라 할지라도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박봉환과의 관계를 명쾌하게 판별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사람 별호가 박길동이란 거 모르시나 보죠?" 처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식당여자는 의자를 당겨 난롯가로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 여자는 위인과는 어떤 사이고, 한밤중 휴게소에서 보았던 그 여자와 위인과의 사이는 또 어떤 관계일까. 여자관계가 복잡한 위인인 것은 분명한데, 도대체 오리무중이었다.

"어젯밤에 그 차를 얻어 타고 주문진까지 도착한 게 전부예요. 별명 따윈 알 턱이 없죠. " 물어 비틀 듯하는 냉소적인 대꾸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불쑥 웃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한번씩 그런 오해를 하던데요. 하지만 사기꾼은 아니니까, 안심하고 계세요. 모레 새벽에는 틀림없이 돌아올 거예요. " "손해를 당할까봐 겁을 먹은 게 아닙니다.

무시를 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을 뿐이죠. " "지금 같은 불경기에 저런 엉뚱한 사람이라도 없다면, 진력나서 못살 것 같지 않으세요?" "하긴…, 생각하기 나름이군요. 식당경기는 어떻습니까?" "이 식당요? 이런 닭장 같은 식당이야 찬바람이 불건 뜨거운 바람이 불건,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겠지요. 그동안 분수 모르고 흥청망청했던 사람들이 버릇 고치자면, 혼찌검이 나겠죠 뭐. " "그럴싸한 얘기군요. " "허튼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사람들이 진작부터 구린 냄새만 진동하는 우리나라 경제를 버릇 고치겠다고 나서보니, 나라 살림꼴이 요모양으로 망조가 들었다는 것이 천하에 들통나버렸답디다."

바늘 쌈지를 입에 물고 톡 쏘는 듯한 독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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