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칼럼]아직 정신못차진 노사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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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경제가 다시 늘어지고 있다.

오늘 내일하던 12월 위기때의 긴장감이 어느새 사라진 느낌이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IMF와 선진국이 한국을 도와주기만 하면 간이라도 당장 빼줄듯이 했다.

물론 사회 일각에서 미.일 등 일부 선진국의 음해공작이 금융.외환위기를 초래했다며 흥분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그 위기의 밑바닥에 한국경제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고 따라서 발빠른 구조조정만이 한국경제에 대한 믿음을 되찾고 침몰을 면하는 길이라고 믿는 분위기였다.

나라살림 줄이기로 시작해 기업도 몸집을 줄이고 경영을 투명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돈줄을 죄고 세금을 더 거두겠다고 했다.

기업은 자산을 내다팔고 고용을 줄이겠다고 했다.

금융기관의 정리도 당연하다고 했다.

여기에 정부는 민간의 구조조정을 돕기 위해 세금을 깎아주겠다고 했고, 실업의 고통을 줄이는데 진력하겠다고 했다.

또 정리해고를 포함한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구조조정의 당연한 전제로 여겼다.

그러던 것이 연초 IMF와 선진국들의 긴급융자를 받으면서 분위기가 뒤집히기 시작했다.

이젠 뼈를 깎는 변신의 몸부림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한국을 돕자고 한 것이 도리어 한국을 총체적인 도덕적 해이 (解弛)에 빠지게 한 것일까. 제도개혁을 서두르던 정부와 당선자측은 '노사정 (勞使政) 협의체' 를 구성해 이들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며, 그 합의가 없으면 마치 제도개혁을 할 수 없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노조는 정리해고제를 도입하기 전에 기업이 먼저 고통을 부담해야 한다며, 안되면 총파업도 불사한다고 한다.

재계도 질세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치권의 '나태' 는 더욱 가관이다.

모든 책임을 정부와 기업에 떠넘기면서 정작 화급한 입법활동에는 늑장이다.

아무리 '밥 먹기 전 배고플 때와 밥 먹은 후 배부를 때가 다르다' 지만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경제가 부도위기를 넘긴 것은 아니다.

기업으로 치면 마치 채권은행단의 '협조융자' 로 겨우 부도를 막아 놓은 상태일 뿐이다.

겨우 되살아나기 시작한 한국경제에 대한 신뢰는 언제라도 다시 무너질 수 있다.

지금 정부.기업.근로자들이 벌이고 있는 책임 떠넘기기를 당장 멈추지 않으면 언제라도 채권은행단은 한국을 포기할 수 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한국경제가 그 회생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언제라도 '한국주식회사' 를 부도처리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이다.

김정수<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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