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노무현 대통령의 고독한 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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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선일씨의 처참한 죽음은 온 국민을 충격과 슬픔, 그리고 당혹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지난 며칠 우리는 억누르기 힘든 감정의 폭발로 인해 그 힘든 상황 속에서 우리의 대통령이 얼마나 적절한 판단을 내리고 명확한 입장을 밝혔는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김선일씨의 죽음을 보고받은 직후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낸 6월 23일 담화는 그 내용이나 격조에 있어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 한국인의 꿋꿋한 자존심 강조

"무고한 민간인을 해치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테러는 반인륜적인 범죄입니다. 테러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코 테러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테러행위를 강력히 규탄하며 국제사회와 함께 단호하게 대처해 나갈 결심임을 밝혀드립니다." 대통령의 어록에서 오래 기억될 이 구절은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대한민국의 입장을 천명한 것으로 적어도 세 가지의 기본원칙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비겁한 테러와 그 위협에 대한민국은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원칙이다. 이것은 테러와의 대결에서 양보나 후퇴는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한 결단과 더불어 한국인의 꿋꿋한 자존심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우리 국민은 어려운 처지에서 이해나 도움을 청하는 상대에게는 과도하리만큼 너그러울 수 있지만 우리를 얕보고 테러와 공갈로 협박하는 자에게는 민족의 자존심을 걸고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천명한 것이다.

둘째, 21세기에 들어서며 날로 심각해지는 국제테러의 위험에 대한 우리의 국가적 인식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반인륜적 범죄인 테러의 확산은 개별 국가에 대한 위협을 넘어 인류문명 자체를 뒤흔드는 인류사회 공동의 적임을 직시하고 국제사회의 단호한 대처에 우리도 적극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

셋째, 국제사회의 갈등 요인이 아무리 심각하다 해도 현존하는 기본질서와 절차를 무시하고 파괴하려는 세력에는 절대로 동조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선택을 재삼 강조하고 있다. 오늘의 세계에는 빈부의 격차를 비롯한 수다한 불평등과 불공정한 요소가 범람하고 있다. 특히 현존하는 국제체제나 질서는 정치.경제.군사 등 모든 면에서 강대국에 결정적으로 유리하며 약소국에 불리하게 편성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테러에 의한 기존질서의 파괴가 보다 공정한 국제사회를 가져온다는 어떤 보장도 없으며 오히려 심각한 혼란과 불안정을 초래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하겠다.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된 우리는 국가이익의 차원에서 국제질서의 평화적 개혁과 개선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반면 혁명적 파괴세력에는 단호히 대처하는 입장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원칙을 차분히 강조한 대통령의 6.23 담화는 국민과 국제사회로부터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대통령이란 참으로 외로운 자리다. 아무리 나라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더라도 끝까지 침착하고 냉정하게 평정을 유지하며 국가의 안전과 이익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단하고 갈 길을 선택하는 최종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 대통령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고인(김선일씨)의 절규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라고 본인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적 감정을 초월해 국가의 진로를 냉정하게 선택해야 하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는 아마도 대통령 혼자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 국민 기대와 신뢰 한층 높여

이렇듯 침통한 상황에서 이라크 추가파병 일정을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재확인한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국민 모두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평화와 정의를 염원하면서도 파병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한사코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러한 양심과 양심, 애국심과 애국심의 대결처럼 쓰라린 갈등은 없다. 김선일씨의 죽음을 계기로 파병반대의 목소리가 한층 커지고 있는 가운데 내려진 노무현 대통령의 어려운 결단은 그에 대한 우리 국민의 기대와 신뢰를 한층 굳혀갈 것이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