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년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올해의 경기전망이 불투명하고 집집마다 감급.실직같은 우환이 닥치다보니 정초 운운하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박재홍 (42.여.인천시부평구) 씨네는 그런 와중에도 지난 1년을 반성하고 또다른 1년을 계획하는 송구영신의 '모범답안' 을 보여주었다.
박씨 가족은 지난해 1월1일 '새해에 이것만은 지키겠다' 는 약속을 정한 뒤 그 내용을 각자 종이에 적어 상자안에 넣어두었었다.
97년의 마지막날 상자를 열어 그 약속들을 얼마나 잘 지켰는지 확인하자는 계획과 함께. '보석함' 이라고 이름지어 거실 TV위에 올려두었던 이 상자는 한해동안 박씨 가족에게 '무언의 채찍' 과도 같았다.
'TV를 덜 보겠다' 던 둘째아들 범준이 (12) 는 만화가 끝났는데도 TV앞에 앉아있다간 상자를 보면서 퍼뜩 스위치를 끄곤했다.
고3이 되는 첫아들 현준이 (18) 는 '논술고사를 대비해 신문을 열심히 보겠다' 는 다짐을 썼는데 어쩌다 TV로 향하는 눈길을 질끈 돌려 신문을 집어들곤 했다는 얘기다.
엄마.아빠 역시 마찬가지. 두 아들을 키우며 목소리만 커진 박씨는 '아이들에게 큰소리 치지않기' 라는 약속을 해놓고, 상자를 볼 때마다 자기 언행을 되돌아보곤 했단다.
스스로에 대한 약속대신 두 아들에게 '어떤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말라' 는 당부의 말을 써넣었던 아빠는 회사형편이 힘든데도 굳건한 모습을 지켜 가족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기위해 애썼다고. 드디어 상자를 열어보기로 했던 구랍31일 저녁. 온 가족이 상자앞에 모여앉았다.
"자, 범준이 약속부터 볼까?
네 생각엔 약속을 잘 지킨 것 같니?" 엄마가 꺼내든 종이엔 예습복습 1시간이상 하기, 양치질 잘하기등 6가지 다짐들이 적혀있다.
"예습복습 잘하는 것 빼곤 웬만큼 지킨 것 같아요. " 옆에 있던 형도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현준이는 여러가지 약속들중 '동네어른께 인사를 잘하겠다' 는 걸 못지켰다고 실토했다.
"야, 이제 엄마 차례다.
"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집어든 박씨의 종이엔 매일 30분씩 가족들과 대화하기등 약속들이 적혀있다.
"엄마는 다 잘 하셨는데 이것만 안됐어요. " 두아들이 꼽은 건 '전화를 간단히 하자' 는 약속. "그래 새해부턴 시계를 옆에 놓고 5분은 안넘길께. " 엄마의 굳은 다짐을 받아내고야 아이들은 잠잠해졌다.
새해 1월1일 아침. 박씨 가족은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올해엔 나라도 우리가족도 더 어려움이 많을거야. 우리 더 힘내서 열심히 살자. " 박씨 가족은 새 약속들이 빼곡히 적인 종이들로 '보석함' 을 채웠다.
신예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