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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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제1장 슬픈 아침 ④

그는 운전석의 사내를 안심 시켜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마디 말로 사내의 경계심을 희석시켜줄만한 언변이 자기에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큰 장애는 그와 운전석의 사내는 익숙한 사이가 아니란 것이었다.

자기는 침대위에서 아내를 안고 곤하게 잠들어 있었을 시각에 이 사내는 언제나 깨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야간에 혼자 차를 몰고 서울에서 주문진까지의 멀고 먼 길을 상습적으로 내왕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두 사람에게서 지금까지 누적되어온 체험의 중력과 누려왔던 삶의 궤적에 유사성이라곤 전혀 없으리라는 것은 그로써 짐작이 어렵지 않았다.

그 삶의 모습들이 진실되었든 아니면, 누추했든 간에 두사람 사이에는 서로가 섣불리 넘볼 수 없는 견고한 장벽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상념들이 말문을 가로 막고 있었다.

게다가 운전석 사내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불규칙한 수면과 식사 따위로 과로운전을 하고 다니는 까닭일 것이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결국은 사내에게 기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동승한지 십여분이나 흘러간 뒤, 사내가 불쑥 던진 말에 그는 소스라쳤다.

"그 주유소에 두고 나온 승용차 고장난 기 아잉거 맞지요?" 한밤중에도 혼자 한계령을 넘나드는 두둑한 배짱과 예리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질문이었다.

정곡을 찌른 질문에 그는 또 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이를 보자카이 내보다는 칠팔년 손위인 형님뻘 되보이는데, 거짓말이라 했더라도 쑥시럽게 생각말고 속시원하게 툭 털어 놨뿌리소. 내 말 맞지요?" "맞아요. 고장난 차가 아닙니다.

근데 그걸 어떻게 눈치 챘어요?" "글씨요. 딱 부러진 물증이 있어서가 아니고, 눈치로 때려잡아서 알아낸 내막입니더. 그렇다면 거짓말은 왜 했습니껴?" "그만한 사정이 있었지요. " 사내는 픽 웃음을 흘렸다.

운전석 옆에 꽂아 두었던 생수병을 꺼내 두어 모금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 "대강 알것네요. 주유소로 들어가서 막상 기름을 널라카이, 집을 나설 때 지갑을 안가지고 나온 걸 알게 되었더라 이거지요? 그런데 우짤락꼬 내 차에 무작정 올라 탔습니껴? 인자보이 형씨도 꽤나 엉뚱한 사람인갑네요. " "속셈이 탄로나고 말았으니 솔직히 말하지요. 사실은 속초까지 가는 길이였거든요. " "속초가 형씨 고향 입니껴?" "아녜요. 어떤 시인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 "인자 뭐라 습니껴. 시인이라 습니껴……? 영변에 약산 진달래라 카는 그런 소설 쓰는 사람 말입니껴?" "소설이 아니고 시지요. " "뭘 쓴다카면, 시고 소설이고 그기 그기지 뭐 별난 게 있습니껴. 안그래요 형씨?" 구태여 고쳐 말한 것에 그는 짜증이 난 듯 했다.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말았다.

예리한 관찰력의 소유자라고 믿었었지만, 시인을 찾아간다는 거짓말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런 말을 해버렸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팔당댐 근처에서 떠올랐던 시구의 잔영이 뇌리에 남아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시인이란 말이 나오기전까지는 수다스럽던 사내의 질문 공세가 칼로 자른 듯 잠잠해졌다.

그 대신 자동차는 자제력을 잃고 과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보도에 그려진 중앙선이 보닛 아래 쪽으로 휘말릴 듯 재빠르게 감겨 들었다.

마주오는 자동차의 전조등이 멀리서는 작은 연꽃처럼 보였다가 가까이 다가오면, 꽃잎들을 갈갈이 찢어 두 사람의 얼굴에 획 끼얹고 달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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