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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알제리,하씨 메싸우드'(4)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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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아! 몇 불 집어주면 되는 건데 말야, 마침 돈 가진 게 있어야지. 그는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루피를 통하여 알제리 보안당국과 연락을 취하고 여권을 되돌려 받는 데에는 백불이 넘어 들었다.

다시 수중에 돌아온 여권을 훑어보고 나서 부장은 그것을 벽에다 사정없이 내던졌다.

- 본사에서 아마 곧 발령을 낼 거야. 세컨더리는 말할 것 없이 드라이일테니. 그러면 곧 서울로 가게 될 테지. 그는 풀린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벌써 새벽 세시였다.

- 난 좀 자야 되겠네. 인제 자네도 눈 좀 붙이라고. 내일부터 또 이래저래 시달릴테니까. 제 할말을 다하고 나니 졸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있는 막사를 나와 반대편 내 막사로 들어가려 하다 발길을 돌렸다.

나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서 전등을 켰다.

그리곤 담배나 한 대 피울 요량으로 의자에 앉았다.

꽤 피곤했다.

나는 책상 위에 남겨져 있던 서류와 필기구를 대충 치우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발 밑에 모래가 서걱서걱 밟혔다.

몇 시간 사무실을 비워 둔 사이에 모래가 창문 틈, 문 틈, 아니면 공기 중으로 스며들어와 있었다.

사막의 모래들은 이런 식으로 다가온다.

아무도 모르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들은 내 옆에 존재한다.

석유가 있다는 것이 거짓이라면 진실은 오히려 사막의 끝없는 모래들로 구성되어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나는 해 보았다.

시추를 해서 석유가 나올 확률은 전세계적으로 실제 5%에 겨우 미친다.

석유는 5%의 존재다.

하지만 사막은 북부 아프리카 대부분에 존재하고 그것은 머지 않아 석유가 고갈되고 말 하씨 일대를 다시 제 영토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 하씨의 생산곡선이 고개를 수그린 지는 벌써 꽤 오래다.

그러면 이곳엔 다시 황량한 모래 바람이 불고 서양인들이 다 떠나 페허가 된 건물들은 몇 만, 몇 억 년을 두고 풍화될 것이다.

그러면 하씨라는 도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리라. 내가 광장에서 알제리인들의 눈빛을 보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모래를 빗자루로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몇 시간 후면 또 다시 이보다 더 많은 모래가 쌓일테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팩스기 상태를 점검한 뒤 내가 있던 막사로 가 침구 안으로 파고 들었다.

석유가 안나오는 하씨에는 더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

부장 말대로 우리의 존재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부장은 곧 서울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으론 기뻐하는 눈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기쁜가?

아니면 슬픈가?

서울에 돌아가면 무엇이 내게 남겨져 있을까?

달라진 것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예전처럼 계속되는 생활, 반복되는 출퇴근과 회사업무, 그 이상은 없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회사와 자취방 사이 십여 분 거리를 오가며 아무 희비 없이 살게 되리라. 부장은 나를 보고 사막 체질이라고 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부장과는 반대로 슬퍼해야 하는가?

아니, 그 사막 체질이란 정확히 뭘 뜻하는 걸까?

부장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부장 말대로 알투층에서도 오일은 발견되지 않았다.

본사에서는 일단 철수를 명했고 나는 현장에 가서 재고 목록을 만들었다.

현장 인부들의 도움을 받아 시추탑 밑과 주위를 돌아다니며 목록과 수량을 파악하여 알제리 정부 귀속분과 우리 회사 권리로 남는 물품과 장비를 나눠 그걸 다시 매각 대상과 비매 대상으로 구분했다.

최대리는 발령을 받아 서울로 먼저 떠났고 나는 보급기지로 돌아와 디에스티용 샘플 열한 개를 튀니지 지사에 보냈다.

부장은 한켠에서 미소를 지으며 귀국축하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놀자구, 뚫어서 다 나오면 누가 안 뚫겠어. 안 나오니까 우리 같은 기술자들이 필요한 거라구. 그러니, 자, 다 잊어버리고 놀자구. 나는 아마 가벼운 향수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부장의 말대로 사막 체질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막을 그리워하는지도. 파티는 부장의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본사에선 생각보다 빨리 철수를 지시했고 부장과 나는 시한에 맞추기 위해 잠을 잊은 채 철수 작업에 매달렸다.

시추결과 보고를 위해 데이터를 빠짐없이 정리해서 챙기고 장비들을 조사하여 박스에 넣고 개인 물품을 꾸렸으며 손상된 장비나 물품들은 따로 목록을 만들었다.

그렇게 정리한 짐이 5톤 트럭 두 대분 이었다.

사람들은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졌다.

헵터는 본사가 있는 영국으로, 루피는 새 임무를 맡아 알제리 남쪽 가담이란 도시로 떠났다.

그외 갱구나 이얀 등 업무상 알게 됐던 사람들은 어디 가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었던 루피는 내가 약속 시간을 착각하고 있던 탓에 결국 보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내 뒤로, 먼지 속에 멀어져 가는 기지를 보며 지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가슴 속이 서늘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일이면 다른 석유회사가 차지할 텅 비어버린 보급기지와, 그 안에서 보낸 삼개월, 그리고 언제나 변함 없던 루피의 미소가 떠올랐다.

부장은 운전을 하며 굳은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덜컹거리는 트럭의 차창에는 모래 먼지만 날릴 뿐이었다.

내 옆에는 이므나우라는 역시 알제리 태생의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마브루카의 친구로 같은 클럽 소속이었다.

나는 무표정히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브루카 만큼 예쁘진 않았다.

지사장한테 신고를 마치고 나자 부장은 아직은 올리브 철이야 하며 나를 바닷가로 끌고갔다.

내가 그동안 보고 있던 사막과는 전혀 다른 백사장의 모래들이 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올리브나무가 배경처럼 서 있었고 그 아래에 부장의 말대로 백사장만큼 하얀 살결의 백인 여자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누워 있었다.

수평선 저 멀리론 요트가 한 척 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맨발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어 내 머리를 흩날리고 있었고 나는 발 끝으로 폭신하고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중해의 파란 물빛을 보았다.

그가 그토록 온몸을 적시고 싶었던 파란 물빛을, 하얀 거품들을. 그리고 그 심연을. 나는 어지럼증이 일어 잠시 태양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바다를 엎어놓은 듯 파랬다.

부장이 또 내 팔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럴 시간이 없어. 내일이면 출국이라고. 내 자네에게 그동안 서운하게 대한 거 없지 않을 거야. 나도 다 알고 있네. 하지만 오늘 이후로 그 생각이 바뀌게 될 걸세. 자, 두고 보라구. 그는 자못 심각했다.

나는 부장에게 이끌려 시내 드라이브를 몇 번이나 한 뒤 칼택이라는 외국인 전용클럽에 갔다.

그리고 여태도 '지중해' 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 자, 오백이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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