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사라져 가는 일본의 양심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3면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내게 ‘마지막 수업’은 모국어의 소중함을 일깨운 작품임에 틀림없었다. 담임이었던 히요시(日吉) 선생님은 “국어는 그 나라와 민족의 정신이다. 따라서 언어를 잃는 것은 그 나라의 정신을 잃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며칠 뒤 사회시간. 일본의 근대사를 배울 차례였다. 선생님은 수업 며칠 전 내게 “한국이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을 적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들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수업이 시작되자 선생님은 “얼마 전 국어 수업 시간에 ‘마지막 수업’을 읽었지요? 실은 우리 일본도 과거 이웃 나라의 언어를 부정한 슬픈 역사가 있었다”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부모님의 도움으로 써간 일제 강점기 이야기를 10분간 친구들에게 들려줬다. 1910년 한·일 합병 이후 한국어와 문화가 말살정책에 휘말리고 창씨개명까지 강요받은 내용,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이야기 등이었던 것 같다. 당시 사회 교과서에는 ‘일본이 군사침략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했으며 45년 패전과 함께 한국은 독립했다’는 몇 줄 분량의 내용이 고작이었다. 그날 수업은 역사의 진실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겠다는 선생님의 양심과 유일한 한국인 제자인 나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출범한 97년 이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본은 그 이전부터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강점을 적극적으로 후세에게 교육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역사왜곡을 계속해 왔다. 이달 초 문부과학성이 새역모의 두 번째 중학교 역사교과서 검정을 통과시킨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28일 일반 판매되는 이 책은 앞서 2001년 검정을 통과한 후소샤판 역사교과서와 같은 내용이다. 한국 침략의 정당화와 합리화,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새역모는 전국을 돌며 새 교과서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등 활동을 늘려가고 있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그나마 역사의 진실을 알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히요시 선생님’들이 정년을 맞아 일선 교단에서 물러나고 있는 현실이다.

박소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