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자문해 보는 97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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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97년을 한마디로 표현할 말은 있을 것 같지 않다.

온 국민이 1년 내내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한 해 였다고나 할까. 연초의 노동법파동에서부터 숨가쁘게 터져 나온 한보사건.김현철사건.기아사태 등으로 실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다가 마침내 국제통화기금 (IMF) 구제금융을 받는 경제위기로까지 침몰하고 말았다.

1만달러의 소득이 6천달러 밑으로 떨어졌고 선진국 진입이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거대한 빚덩이를 안은 3류국으로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내일이 바로 새해지만 사회 어느 구석에서도 새해를 맞는 희망과 밝은 전망은 보이지 않고 불황과 실직, 고통과 불안의 어두운 그림자만 느껴질 뿐이다.

왜 우리가 이렇게 됐는가.

97년을 다 보내기 전에 우리는 모두 한번쯤 이런 물음에 답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19세기말 우리는 바깥세상을 모르고 있다가 결국 망국 (亡國) 의 치욕을 당했다.

1백년 후인 20세기말 우리는 다시 변화하는 세계에 우리 자신을 적응시키지 못해 혹독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국경없는 세계에서 경쟁하는 게임룰도, 노하우도 모르는 무능한 국가경영과 그런 정치.경제구조 속에서 바로 내일의 자기운명도 모른 채 1만달러 소득이니, 선진국 진입이니 하는 우물안 개구리의 깨춤을 추다가 오늘의 위기를 자초한 게 아닌가.

지금의 경제위기는 단순히 경제를 잘못해서, 또는 외환이 부족해서 일어난 위기가 아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오도 (誤導).방치한 정부와 정치권과 기업인.전문가.지식인… 우리 모두가 올바른 위치에 서지 못하고 바른 방향으로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IMF의 강요된 개혁은 이제부터 우리가 바른 위치와 방향을 잡아 세계 경쟁의 룰과 노하우를 체득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위대한 낙관은 위대한 비관이 있고서야 나온다는 말이 있다.

97년이 한국의 새로운 도약의 출발점이 되느냐, 3류국 몰락의 시작이 되느냐는 이제부터 우리가 하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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