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Q 지휘자의 역할은 뭔가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0호 07면

무대 위에 빈손으로 올라오는 연주자들이 있습니다. 성악가, 피아니스트, 하프 연주자 등은 별도의 ‘개인 준비물’ 없이 무대에 서죠. 그런데 악기도 없고, 목소리마저 안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핏 보면 ‘무임 승차’가 따로 없습니다. 바로 지휘자입니다.

김호정 기자의 클래식 상담실

그런데 이 지휘자, 없어도 그만 아닐까요? 몇 해 전 한 강의식 콘서트에서 지휘자 박은성씨가 이 점을 실험한 일이 있습니다. 당시 수원시향을 이끌던 그는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를 보여 주겠다”며 지휘봉을 놓고 뒷짐을 졌습니다. 실험 곡목은 브람스의 교향곡 1번 4악장. 연주자들이 현악기의 현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뜯으며 시작하다 소리가 커지고 템포도 빨라지는 곡이죠. 한마디로 음악이 ‘증폭’되는 부분인데요, 지휘자를 잃어버린 80여 명의 단원은 각자가 느끼는 대로 연주했고, 음악은 엉망이 됐습니다. “자 보셨죠? 저 그렇게 놀고먹는 사람 아니랍니다.” 청중의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럼, 지휘자는 박자를 맞추는 기계일까요? 빨라지지 않게, 혹은 호흡이 맞도록 하기만 하면 될까요? 그렇기만 하다면 ‘카라얀 스타일’ ‘푸르트벵글러 스타일’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동독의 상징이 된 지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1912~96)의 연습 장면을 담은 DVD를 보면 지휘자의 ‘업무 진행’을 좀 더 정확히 알게 됩니다. 작품의 마디 번호까지 정확하게 외우고 있으며, 작곡 배경과 진행 스타일까지 세세히 단원들에게 설명하죠. 이 연습에 올라오기 전까지 홀로 수많은 연구를 거쳤을 테니까요.

이쯤에서 라흐마니노프가 떠오르네요. 그는 자신의 교향곡 1번의 초연이 비평가들의 혹평에 시달리자 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는 사실, 지휘자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가 술에 취한 채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라는 뒷얘기도 있습니다. 잘 훈련된 단원들이라도 수십 명이 함께 연주하는 ‘소용돌이’에 있으면 중심을 잡아 줄 사람이 필요한 법이죠. 물론 제정신이어야 하고요.

연주 방향을 미리 구상하고, 단원들에게 그 뜻을 전달하고, 음악을 이끌고 가는 것이 지휘자의 역할입니다. 무대 위 모습은 작은 부분일 따름이죠. 지휘자에 따라 같은 작품의 연주 시간이 10분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할 정도로 주도권이 엄청나거든요.

전국 17개 교향악단이 차례로 연주하는 ‘2009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도 재미있는 일화로 시작했습니다. 개막을 맡은 부천필하모닉의 20년지기 지휘자 임헌정씨가 몸이 좋지 않아 몇 달 전부터 무대에 서지 못했습니다. 객원 지휘자 최희준씨가 대신 지휘했는데요. 부천필하모닉의 색채가 확 바뀌었습니다. 대담하고, 발랄한 이날 연주는 지휘자에 따라 오케스트라가 많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임헌정씨가 연주했다면 또 다른 색깔을 들려줬겠죠? 감독에 따라 달라지는 영화처럼, 오케스트라도 지휘자라는 ‘연출자’에 따라 변신한답니다.


A 연주의 색깔을 들려주죠


중앙일보 문화부의 클래식·국악 담당 기자. 사흘에 한 번꼴로 공연장을 다니며, 클래식 음악에 대한 모든 질문이 무식하거나 창피하지 않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