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깊이 읽기] 금본위제 포기는 인류의 뼈아픈 실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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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골드-과거 그리고 미래의 화폐
네이선 루이스 지음, 이은주 옮김
에버리치 홀딩스, 608쪽, 2만8000원

10년도 넘은 일이지만 지금도 떠올리면 고통스럽다. 1997년 한국을 강습한 외환위기 얘기다. 연 20%가 넘는 살인적인 고금리와 높은 세금. 알짜 기업들도 부실의 이름을 쓰고 헐값에 외국에 팔렸다.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근로자들은 줄줄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그런데도 환율·물가는 치솟고, 재정 적자는 깊어졌다.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의 진단과 처방에 따른 결과다.

그 때 이 책이 나왔었더라면 어땠을까. 혹시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현장경험이 있는 경제저널리스트인 지은이는 당시 한국에서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이 서방 은행들을 위한 조치였다고 단언한다. IMF가 한국민의 허리띠를 졸라매 한국 기업과 금융회사가 서방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도록 했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은 경제 위기가 아니라 단지 통화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엉뚱한 처방을 내렸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통화 위기는 그 나라 돈값이 싸져서 생긴다. 돈 발행량을 줄여 돈값을 올리면 그뿐이다. 그런데도 IMF가 고금리, 증세 처방을 한 것은 감기 환자에게 암치료용 방사선을 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의 재정은 튼튼했고, 기업 부채도 문제될 게 없었다. 같은 일이 서방세계에서 벌어졌다면 결코 같은 처방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확언한다.

그의 처방은 금본위제다. 5000년 전부터 쓰였고, 본격 화폐 제도가 등장한 근세 400년간 아무 문제없이 작동한 금본위제. 이걸 인류가 포기하는 바람에 세계 경제 곳곳에서 잡음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90년대 말 동아시아 위기는 물론, 아르헨티나·멕시코·브라질·러시아·유고슬라비아의 초인플레이션과 경제 위기도 변동환율제 때문이란다.

금본위제는 장점투성이다. 낮은 금리, 안정된 통화 가치, 인플레이션 걱정 없는 산업생산을 보장한다. 금본위제가 되면 인기 직종도 바뀐다. 외환딜러나 파생 상품 담당자는 고졸 학력이면 충분히 할 수 있게 된다. 원·달러 환율이 1% 차이 넘게 벌어지는 일이 10년에 한번쯤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 핫머니의 환투기는 아예 물 건너 가게 된다.

필자의 금본위제 찬양은 끝이 없다. 세계 역사상 한 나라 경제가 가장 찬연히 꽃피웠던 때는 모두 금본위제 아래서다. 고대 그리스·로마는 물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과 ‘팍스 아메리카나’가 예다. 미국이 머뭇거리는 동안 중국·러시아가 연대해 금본위제를 채택하면 세계 경제의 중심축이 바뀔 것이란 경고도 잊지 않았다.

제목은 골드지만, 실제는 인류의 금융·통화 시스템 전반을 다뤘다. 맨큐나 버냉키 경제학이 공식 교과서라면, 이 책은 참고서라 할 만하다. 혼자 학습이 가능할 만큼 쉽고 친절하다. 경제와 통화위기에 대한 고정관념도 확 깨 준다. 옮긴이는 “독자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선보이고 싶어 조바심이 들만큼 흥미롭고 유익한 책”이라고 말했다. 딱 맞는 말이다.

이정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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