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만 달러의 결투 … ‘노무현 vs 검찰’ 한쪽은 치명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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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악연도 보통 악연이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검찰의 관계가 그렇다. 현직 때도 노 전 대통령은 검사와의 대화에서 “이 정도면 막가자는 거지요”라고 했었다. 박연차 사건의 수사가 자신을 옥죄어 오자 노 전 대통령은 “해명과 방어가 필요할 것 같다”며 검찰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 싸움은 패자가 분명해져야 끝날 수밖에 없게 됐다. 여론으로만 보면 노 전 대통령 쪽이 불리하다. 부인 권양숙 여사가 13억원을 받은 사실도 이미 인정했다. 노 전 대통령에게 반격할 카드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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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칼날을 세웠다.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피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검찰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갖추면서도 혐의를 구체화하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소환도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다. 이르면 주말께 노 전 대통령 소환을 검토 중이다.

검찰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 노 전 대통령의 해명에 대해선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하겠다”며 대응을 자제했다.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은 13일 “장외에서 논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수사는 정치가 아니라 사법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이틀 연속 노 전 대통령의 가족을 조사한 대검 중수부는 심증을 굳혀 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600만 달러의 종착지라는 것이다. 권양숙 여사와 노건호(36)씨를 한 차례씩 조사한 이후 검찰 입장은 더욱 확고해진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이날 출두 예정이던 건호씨 소환을 연기했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도착한 다음 날 곧바로 불러 조사했던 하루 전 상황과는 대조적이다. 권 여사에 대해서도 “굳이 다시 부를 필요는 없다”고 했다.

권 여사는 100만 달러와 3억원을 자신이 받았다고 밝혔다. 건호씨는 박 회장의 500만 달러의 수혜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검찰은 두 사람 모두 “피의자 아닌 참고인 신분”이라고 강조했다. 수사 타깃은 노 전 대통령이라는 중수부의 의지가 강하게 배어 있는 것이다.

중수부는 일단 ‘100만 달러+3억원’을 노 전 대통령에게 건네진 돈으로 결론내렸다. 권 여사는 검찰에서 “빚을 갚는 데 돈을 사용했지만 용처는 말하지 않겠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검찰 관계자는 “뇌물의 사용처를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 돈을 뇌물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노 전 대통령을 ‘피의자’로 보고 있다는 의미다. 권 여사가 돈의 사용처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이상 그 돈은 노 전 대통령에게 건네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

500만 달러 의혹도 노 전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검찰은 타나도 인베스트먼트라는 투자회사가 건호씨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정황 증거를 확보해 가고 있다.

하지만 대검 수뇌부의 고민은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결정적 증거를 확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박연차 회장을 비롯해 다양한 피의자와 참고인들의 진술·정황을 확보했으나 계좌추적 결과나 입금전표 같은 물증을 손에 쥐지는 못했다. 검찰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을 상대로 한 수사는 호랑이(노 전 대통령) 등에 타고 달리는 형국”이라며 “자칫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면 검찰도 큰 상처를 입게 된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증거”라는 노 전 대통령에게 맞설 중수부의 히든카드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악연으로 바뀐 ‘노무현-박연차’ 관계=600만 달러를 둘러싼 대결이 본격화하면서 노 전 대통령과 박 회장의 관계도 악연으로 바뀌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였던 박 회장은 이번 검찰 수사에서 노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의혹이 사실인지 입증할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100만 달러에 관해 “노 전 대통령을 보고 준 돈”이라고 말했고, 500만 달러에 관해선 “노 전 대통령이 (연씨에게로) 송금을 지시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 측에 돈을 전달한 장본인인 박 회장의 이 같은 진술은 검찰 수사의 밑그림이 되고 있다.

특히 문제의 600만 달러가 계좌추적이 어려운 현금인 상황에서 자금의 성격과 전달 과정, 사용처 등에 관한 박 회장의 진술이 얼마나 구체적이냐가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 여부를 좌우할 변수로 분석되고 있다.

이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은 12일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박 회장과의 ‘진실 게임’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분명히했다.

그는 “보도를 보니 박 회장이 내가 아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면서 “일단 사실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노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될 경우 박 회장과 대질조사 받을 가능성이 크다. 노 전 대통령이 1988년 총선을 통해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해온 박 회장과 검찰 조사실의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공격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김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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