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문화유산의 해를 마치며…정책표류속 우울한 '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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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8일 오후.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창덕궁에서는 '97 문화유산의 해' 폐막식이 거행됐다.

최근 창덕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을 경축하는 뜻에서였지만 신명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옷깃을 여민 문화계 인사들은 문화정책에 밀어닥칠 IMF한파를 걱정하는 말로 서로간 인사를 대신했다.

그동안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가장 먼저 감축됐던 것이 문화분야였기 때문이다.

경제불황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연초에 계획했던 우리문화유산 '알기' '찾기' '가꾸기' 사업들이 그럭저럭 마무리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알기' 사업으로 ▶답사안내 책자발간 ▶전문가와 함께하는 유적답사, '찾기' 사업으로 ▶윤선도의 해남 금쇄동유적조사 ▶북한의 무형문화재 재현, '가꾸기' 사업으로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개관 ▶천연기념물 가꾸기사업등 다양한 사업이 시행됐고 진행과정에서 취소된 사업은 봉수재현.포석정재현.궁중유물도록발간등 7건, 추가로 채택된 사업이 18건으로 모두 84건의 사업이 결실을 맺었다.

문화유산의 해 조직위원회에 배정된 예산은 문예진흥기금 10억원. 예산과 인력면에서의 한계때문에 당초 조직위원회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사업은 협찬을 통해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부도의 파도속에서 기업협찬을 기대하기 힘들었고 그 결과 7건의 사업이 취소된 것이다.

추가된 18건은 대부분 학술행사 지원에 불과하다.

유물의 복원이나 문화재 CD롬제작등이 예산부족으로 취소된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심각한 사실은 문화정책의 근간을 이룰 법.제도의 정비가 표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범식때 고병익조직위원장은 "일과성 행사보다는 문화유산에 대한 정책적 토대마련에 주력하겠다" 고 밝혔다.

이에 따라 문화재보호법 정비, 고도보존법 제정, 문화재관리국의 '청' 승격 및 문화재관련 전문인력확충등이 추진됐다.

그러나 문화유산의 해가 막을 내린 지금까지 '토대마련' 은 안개 속에 머물러 있다.

정기국회의 파행으로 문화재보호법은 내년으로 넘어갔고 고도보존법의 제정도 불투명한 상태다.

'청' 승격과 동반될 문화재연구소의 이전문제도 내년도 예산에서 제외됐다.

다만 문화재관리국과 조직위원회가 고고학회에 의뢰한 '매장문화재 발굴용역 대가의 기준' 이 시안이라도 마련된 것은 다행이다.

매장문화재 발굴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기준이 없어 힘들어 했던 고고학계의 숙원이 서광을 본 것이다.

그러나 함께 추진했던 '발굴전담기구' 의 육성은 아직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한병삼 집행위원장은 "내년으로 미뤄진 법안과 제도개혁등은 경제가 좋아도 지방자치단체.건설교통부등과의 마찰이 심할텐데 IMF체제에서는 더욱 불투명할 것으로 보인다" 고 말했다.

그래도 이날 문화계 인사들은 세계 유일의 '문화유산헌장' 제정을 높은 성과로 꼽고 자족했다.

곽보현 기자

<문화유산현장>

문화유산은 우리 겨레의 삶의 예지와 숨결이 깃들여 있는 소중한 보배이자 인류문화의 자산이다.

유형의 문화재와 함께 무형의 문화재는 모두 민족문화의 정수이며 그 기반이다.

더욱이 우리의 문화유산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많은 재난을 견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문화유산을 알고 찾고 가꾸는 일은 곧 나라사랑의 근본이 되며 겨레사랑의 바탕이 된다.

따라서 온 국민은 유적과 그 주위환경이 파괴.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문화유산은 한번 손상되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이킬 수 없으므로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대로 우리도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 줄 것을 다짐하면서 문화유산헌장을 제정한다.

1.문화유산은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되어야 한다.

1.문화유산은 주위환경과 함께 무분별한 개발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1.문화유산은 그 가치를 재화로 따질 수 없는 것이므로 결코 파괴.도굴되거나 불법으로 거래되어서는 안된다.

1.문화유산보존의 중요성은 가정.학교.사회 교육을 통해 널리 일깨워져야 한다.

1.모든 국민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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