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일간신문 창간 … "첫 신체시 쓴 시인” 주장도

중앙선데이

입력 2009.04.12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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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호 20면

통치자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유혹을 떨치기 힘들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경우도 후계자로 삼을 만한 인물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럴 만도 했다. 이승만은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일 뿐만 아니라 초대 국회의장이기도 하다. 우남은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마련한 초대 국회의장인 것이다. 이승만은 힘들면서도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3·1운동 이후 수립된 6곳 임시정부에서 대통령·부통령·국무총리 급의 지도자로 추대됐다.

선구자 이승만

이승만에겐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다방면에서 따라붙는다.
-이승만은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운동 단체라고 할 수 있는 독립협회의 주역 중 한 명이었다.

-이승만은 1898년 4월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24세에 창간해 사장 겸 주필로 활동했다. 매일신문은 당시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언론 발달의 기폭제 구실을 했다.

-이승만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프린스턴대에 제출한 박사논문인 ‘전시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1910)은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발간됐다.

-이승만은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1941)로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이승만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新體詩)를 쓴 시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는 협성회회보 1898년 3월 9일자에 ‘고목가(Song of Old Tree)’라는 제목의 시를 게재했다. ‘고목가’는 최초의 신체시로 평가받는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1908)보다 10년이나 앞선다.

-이승만이 1904년 한성감옥에서 저술한 "독립정신"은 우리나라 최초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이승만에게는 단기간에 목표를 성취하는 집중력이 있었다. 배재학당에서 2년간 수학하며 상당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게 됐다. 그는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유창한 영어 연설을 했다. 졸업식에 참석한 정부 고관들과 주한 외교 사절들에게서 극찬을 받았다.

이승만은 뛰어난 영어 실력 덕분에 독립투쟁기와 국가 건설기에 미국을 상대로 서신·기고·면담·성명(聲明) 외교를 활기차게 펼칠 수 있었다. 1954년 7월 28일 미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는 감동적인 연설로 기립박수를 포함해 33회의 박수를 받았다.
그는 동양적인 문화 소양도 남달랐다. 그는 옥중 시집인 체역집(替役集) 등에 160여 편의 한시(漢詩)를 남겼다. 필치(筆致)와 난초 그리기도 뛰어난 예술인이었다.

이승만은 한마디로 요즘 부쩍 강조되는 문사철(文史哲:문학·사학·철학)의 소양이 빼어난 지도자였다. 철인(哲人)정치를 할 수 있는 모든 자격 요건을 구비했다. 그의 인간관은 평등주의적이기도 했다. 그는"독립정신"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글로만 쓴 것은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중간층 이상의 사람이나 한문을 안다는 사람은 대부분 썩고 잘못된 관습에 기대할 것이 없고, 그들의 주변 사람들도 비슷하다.”

그의 뛰어남이 권력 승계의 제도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 것은 대한민국 초기 헌정사 최대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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