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소비자탓" 얼굴 두꺼운 재경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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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소비자가 무슨 죄인입니까. 정작 잘못은 자기들이 해놓고 어떻게 국민 탓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 "정부가 마치 과소비가 경제위기 주범인 것처럼 몰아붙이는 바람에 우리까지 문닫을 지경" 이라는 한 남대문시장 상인은 "왜 정책 실기 (失機) 의 책임부처인 재정경제원의 반성이나 조직 축소 이야기는 안나오느냐" 고 개탄했다.

증폭되는 위기감 속에서 기업.국민들은 '경제 살리기' 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공무원 사회는 아직도 '네 탓' 이란 인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 1일 한국소비자보호원이 내놓은 '우리나라 소비실태' 발표를 둘러싼 과정은 과연 재경원이 현상을 제대로 인식하고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해외여행에서 달러를 물쓰듯 쓰고, 멀쩡한 승용차.가전제품을 쉽게 갈아치우고, 석유 한방울 안나면서 기름은 펑펑 쓰고…. 이런 내용의 '우리나라 소비실태' 보고서는 원래 소보원이 9월부터 자료수집.분석에 들어가 빨라야 이달 말께나 재경원에 보고하기로 돼 있었다.

당초 목적은 소비자 부문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단계적인 개선책을 찾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갑자기 재경원으로부터 "빨리 자료 준비하라" 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 때문에 소보원 관계자들은 밤샘작업을 벌였고, 초점도 '국민 과소비' 에 맞춰졌다.

발표도 재경원이 직접 하겠다는 것을 겨우 설득해 소보원에서 맡았다고 한다.

물론 우리 국민의 소비행태에 반성할 점이 적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최근 각계에서 '경제 살리기' 운동이 자율적으로 확산되는 것도 이런 자성 (自省) 을 기초로 한 것이리라. 하지만 우리 경제를 이렇게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간 근본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굳이 따지자면 정책 당국자들이 아닐까. 특히 재경원은 몇달 동안이나 기아에 질질 끌려다니며 국가신용도 추락을 심화시켰고, 한치 앞도 못내다본 채 "우리 경제 펀더멘털은 괜찮아 IMF에는 기대지 않아도 된다" 고 큰소리 치지 않았던가.

최근 기업들은 50% 감원등 '뼈를 깎는' 몸부림을 치고 있다.

공무원들은 이런 책임의 일부라도 분담하고 있는가.

근무중 골프를 치고 개발정보를 빼내 땅투기나 하는 모습, 기껏 '국민들이 과소비한다' 는 자료나 서둘러 발표하는데 신경을 쓰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도 그렇지 못한 것같다.

김태진 유통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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