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고객 외면한 한미은행 파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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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현철 경제부 기자

한미은행 노조의 파업이 예상 밖으로 길어지고 있다.

이번 파업은 씨티은행 한국지점과의 합병을 앞둔 한미은행 직원들이 일자리에 불안을 느낀 데서 비롯됐다. 씨티은행 한국지점의 노사는 한미은행을 인수키로 한 후 '보직 배치 때 본인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한다'는 내용의 합의문을 채택했다. "이런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합병이 되면 한미은행 출신들은 씨티은행 출신에 밀려 한직이나 지점으로 밀려날 것"이라는 게 한미은행 노조의 주장이다.

한미은행 노조는 '보직 보장'에다 상장폐지 철회, 독립경영 보장, 씨티그룹의 인수 철회와 같은 요구사항을 파업 철회 조건으로 내걸었다. 대부분 주주의 권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노사협상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은행 성장에 대한 기여나 합병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성과급과 보로금을 달라는 것도 파업의 이유가 되기는 무리다.

씨티그룹과 한미은행 측의 대응도 문제다. 은행 측은 지난 석달간 노조와 단체협상을 해 왔다. 노조는 그동안 수차례 파업을 불사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도 은행 측은 설마 파업까지 하겠느냐고 안이하게 대처했다. 노조가 지난 25일 파업에 들어간 이후 처음 은행영업을 시작한 28일 전국의 한미은행 지점들은 거의 마비됐다. 정상적으로 문을 연 거점점포에서도 입.출금 등 단순 업무만 처리됐다.

파업으로 당장 불편과 손해가 큰 쪽은 은행도 노조도 아닌 고객들이다. 지점에 가도 사람이 없고 자동화기기도 현금이 바닥나 허탕을 쳤다.

파업사태가 계속돼 고객이 발길을 돌리면 노도 사도 모두 잃는다. 외환위기 때 극심한 노사 대립을 겪은 한 투신사의 엘리베이터에 걸린 문구는 의미심장하다. '고객을 떠나보내는 데는 10분, 다시 돌아오게 하는 데는 10년.'

나현철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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