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163. 김경문 두산감독의 '건강한 번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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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동점 상황의 9회초. 선두타자로 나선 나는 팀에서 가장 못치는 8번 타자다. 상대 투수는 당대 최고의 왼손투수 이선희. 나는 발도 느린 포수다. 그렇다고 그냥 아웃될 수는 없다. 꼭 공격의 물꼬를 트고 싶다. 한국 프로야구 첫 한국시리즈다. 평생 기억에 남을 경기 아닌가.

초구 파울이다. 2구는 볼. 3구째다. 나는 기습번트를 시도한다. 제대로 댔다. 타구는 3루수 쪽으로 구른다. 앞만 보고 1루를 향해 뛴다. 간발의 차이. 세이프다.

무사 1루가 되자 상대팀 삼성이 흔들린다. 원 아웃 뒤 윤동균의 안타와 김광수의 몸맞는공으로 1사 만루가 됐다. 다음 타자인 김우열은 내야플라이로 물러났다. 투 아웃에 만루. 그 다음 타자인 신경식이 볼넷을 골라 내가 밀어내기로 홈을 밟는다.

그리고 곧바로 김유동의 그림 같은 만루홈런이 터진다. 순식간에 8-3. 우리 팀 OB는 그렇게 프로야구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결정지었다.

독백 형식으로 구성한 윗글 '번트의 추억'에서 '나'는 김경문이다. 그는 1982년 10월 12일 한국시리즈 6차전 9회초에 허를 찌르는 기습번트를 성공시켜 OB 베어스 우승의 실마리를 풀었다.

그리고 22년이 지난 지금, 그가 지휘봉을 잡은 두산 베어스는 프로야구 순위표 맨 꼭대기에 올라 있다. 예상을 깬 선두 질주다. 그 과정에서 번트를 잘 대지 않는 김 감독의 공격적인 스타일이 부각되고 있다.

김경문 감독의 두산은 번트가 얼마나 적을까. 29일 현재 팀 희생번트 32개. 기아와 '함께' 가장 적다. 그 다음이 LG의 34개다. 기록으로 보면 두산이 유독 번트를 안대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김 감독이 유난히 번트와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건 '이번에 번트가 나올 때'라고 여길 때 선수들에게 번트를 지시하지 않아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번트는 소금이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맛을 낼 수 없는 것처럼 야구에서 번트는 모든 공격의 조화를 이루게 해주는 꼭 필요한 양념이다."

그 역시 번트가 꼭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철저히 시도한다. 하지만 1점 뒤진 9회말 무사 1루라고 '무조건' 번트를 대지는 않는다. 그동안 '정석'이라는 이름으로 받들어온 일종의 습관으로 치부해 버린다.

그의 소신처럼 경기 흐름과 타순, 주자의 발 등 여러 상황에 따라 강공이 훨씬 더 효과적인 작전일 수 있다. 정답은 없고 결과가 그날 그날의 답일 뿐이다.

김 감독의 번트는 무조건적이지 않다. 적절한 때 '건강한 번트'를 골라댄다. 22년 전 그날 똑똑한 번트 하나로 팀에 영예를 안겼을 때처럼.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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