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가 봤습니다] 최석호 기자의 강남 대성학원 체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4면

강남대성학원. 부모가 돈 많다고, 힘세다고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언어·외국어·수리 표준점수(총점 인문계 434점·자연계 430점) 합계가 400점은 넘어야 등록할 수 있다. 3개 과목 모두 1등급인 우수 학생 1500명이 모여 있다. 기자가 이곳을 선택한 것은 최상위권 재수생이 다닌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 1일 오전 7시30분 교대역에 도착하자 어깨엔 책가방, 한 손에는 도시락 가방을 들고 지하철역을 빠져나가는 학생들이 보였다. 교복을 입지 않았다. 피로에 찌든 모습이 누가 봐도 재수생이다. 오전 7시50분 등교시간을 맞추기 위해 뛰는 재수생도 보였다. 학원에 들어선 학생들은 ‘늦지 않아 다행’이라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전 7시50분이 넘자 생활지도부 교사가 출입문 앞에서 학생들을 기다린다. “학교도 아닌데, 생활지도부가 있나?” 기자는 의아했다. 이날 학생 14명이 지각을 했다. 책가방을 머리 위로 올리고, 십수 회에 걸쳐 앉았다 일어났다 기합을 받았다. 김명준(54) 부원장은 “재수생활은 한번 느슨해지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다”며 “생활적인 면을 확실히 관리해야 효율적인 학습도 가능한 법”이라고 설명했다. 오전 8시 인문 2반(정원 59명)을 배정받은 기자는 학생들과 간단한 인사를 한 뒤 맨 뒤편 빈자리에 앉았다. 첫 수업은 수학 방송수업이었다. 월·수·금 첫 시간은 국어·영어·수학 방송수업이 진행된다.

고교 VS 재수생활

앞자리에 있던 이상준(19·과천외고 졸)군이 1교시 수업 내내 꾸벅꾸벅 존다. “어제 잠 못 잤느냐”고 묻자 “상가에 문상을 다녀온 데다 아침밥을 굶어서 힘들다”고 답했다. 아침을 거른다는 건 재수생활을 하면서 달라진 점이다. 이군은 “고교 시절에는 어머니가 주무시고 계셔도 일어나 밥을 차려달라고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한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때는 당당하게 했던 말도 대입 낙방 후에는 부모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눈치를 보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든다고 했다.

학원 앞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주민광(19·검정고시)군은 재수 생활 3개월 동안 경기도 부천 자신의 집에 가본 적이 없다. 안산 경안고에 다니다 2006년 말 학교를 그만둔 뒤 검정고시를 통해 지난해 수능을 봤다. 생각보다 점수가 안 나와(언어·수리·외국어 표준점수 404점) 대학 원서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두 달치 학원비 150만원에, 고시원 한 달 방세만도 120만원씩 드는데 부천까지 오가느라 드는 차비 등을 생각하면 부모님께 너무 죄송하다”고 말했다. 어질러진 방을 보며 부모님 손길이 그리워 눈시울을 적신 적도 수차례다.

어제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방송수업이니까 등 이런저런 이유로 1교시 수업 동안 일곱 명의 학생이 졸았다. 하루 짝꿍이었던 임지은(19)양은 “1교시 방송수업 때 자는 아이들이 가장 많다”며 “2교시부터 실제 선생님들의 강의가 시작되면 그 수가 줄어든다”고 말했다.


고민 & 불안감

2, 3교시에는 사회 과목 이동수업이 이뤄졌다. 인문계 14반, 자연계 12반 총 1500명의 학생들이 자신의 선택과목에 따라 반을 이동했다. 좁은 복도 때문에 계단을 오르려면 줄을 서 기다려야 했다. 한 층을 이동하는 데만도 2~3분이 걸렸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전쟁이었다. 인문 2반이 있는 2층에는 140여 명이 생활하고 있지만 화장실 변기는 단 3개. 장혜원(18·목동고 졸)양은 “이동수업을 한번 하고 나면 맥이 풀릴 정도”라며 “특히 여자화장실의 경우 변기가 2개이기 때문에 다른 층 학생들까지 몰리면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운 좋게 빨리 자리를 맡은 이래형(19·대구 대륜고)군은 바람을 쐬러 간다고 했다. 바람 쏘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해봤자 비상계단이 전부다. 쉬는 시간이면 수십 명의 학생이 그곳에 몰린다.

이군은 고1 때부터 사귀던 여자친구 때문에 고민이다. 그는 “대학에 합격한 여친이 남자 선배들과 술자리에 간다는 소식에 책이 눈에 안 들어온다”고 말했다.

전현석(19·풍생고 졸)군은 오후 10시까지 학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자정이 넘어서까지 공부를 하지만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고교 시절 내내 “SKY대는 문제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다 수능 날 컨디션 난조로 모의고사 성적보다 5점 이상 떨어졌다. “이번에도 그 상황이 재연되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이 여전하다. 그는 “한번 실패하고 보니 자신감이 없어졌다”며 “불안감이 공부의 가장 큰 적”이라고 말했다.

외로움과의 싸움

3교시가 끝나면 학생들은 지하 매점으로 몰린다. 점심시간 전에 미리 도시락을 구입하겠다는 요량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도시락을 사 먹어야 한다.

대구에서 유학 온 금인기(19·대구 경북고 졸)군은 “재수 초반에는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그래도 이제는 적응이 돼 “오늘 도시락 반찬은 뭘까”라며 상상하는 게 낙이 됐다. 60만원짜리 고시원에 살면서 아침·저녁을 고시원에서 해결한다. 최근 5㎏이 빠졌다. 지난주엔 몸살이 났지만 돈 아낀다고 병원 한번 못 갔다. 그는 “혼자 밥 챙겨먹고, 설거지·빨래하는 게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다”며 “주말이면 혼자 서울교대에서 농구를 하는데 처량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장혜원양은 학원에 가다가 대학에 들어간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대학 다닐 나이에 도시락을 들고 재수학원에 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숨었다고 했다. 자신을 숨겨야 한다는 게 더 큰 고통이었다. ‘쟤는 재수하니까’라며 고교 동창들이 모임에 자신을 부르지 않는 것도 서운했다. 공부 외에는 할 것이 없는 고립무원 상태다. 장양은 “정말 독한 마음으로 공부만 했는데, 3월 모의고사 성적이 좋지 않아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다”며 “모든 걸 포기하고 하는 재수생활인데 외로움에 성적 스트레스까지 더해지니 진퇴양난”이라고 고백했다.

도전

오후 3시40분 정규수업을 마친 학생들은 지하 자습실로 향했다. 의무는 아니지만, 재원생 80%가 학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한다. 한석호(19·중대부고졸)군은 “친구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경쟁심에 더 열심히 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군은 재수를 결심하면서 500일 이상 사귀었던 여자친구와도 결별했다. 미니홈피도 문을 닫았다. 펀드매니저가 꿈인 한군은 “어차피 택한 길이라면 좀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며 “연세대에 함께 지원했던 고교동창은 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친구보다 회계사 시험은 먼저 합격하겠다는 목표가 있다”고 말했다. 말투에서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주민광군은 서울대 경영학과 진학이 목표다. 로스쿨을 거쳐 주식 전문 변호사가 되는 게 꿈이다. 이날 오후 10시 자율학습을 마친 주군은 두 평 남짓한 자신의 고시원에 기자를 초대했다. 책상 위에 붙은 한마디 글귀가 그의 굳은 각오를 보여줬다. ‘주민광! 1년 동안 자식 얘기에 고개 숙일 부모님을 생각해라! 내년에는 부모님의 피눈물을 닦아드리자. 꼭!’

어쩔 수 없이 택한 길. 그래도 꿈이 있기에 그들은 자정이 넘도록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있는 모양이다.

글=최석호 기자
사진=전영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