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김영삼대통령의 실명제 집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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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은 밴쿠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금융실명제 보완론을 일축했다.

정치권과 경제계가 당면한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실명제 보완방안을 역설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만약 경제난 타개에 실명제가 걸림돌이 된다면 일시적인 보완조치를 통해서라도 그 장애요인을 제거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펴 온 우리는 그래서 다시 한번 실명제의 실효있는 운행 (運行)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할 것을 촉구한다.

만약 金대통령의 지적대로 실명제를 건드려봤자 경제적 실익은 없고 혼란만 초래한다거나 오히려 부정부패를 촉진한다면 실명제 보완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과 재계는 이른바 검은 돈의 양성화가 절실한데도 실명제 때문에 그것이 지체되고 있다고 판단한다.

기업의 자금난은 극심한데도 거액의 자금이 장롱속에 또는 은행의 가.차명 계좌 속에 숨겨져 있다고 본다.

결국 휴면상태에 있는 이 자금을 제도 금융권으로 진입시키는 것이 난국 타개의 한 방안이 되는 것이다. 지금 경제계는 만기가 되는 금융대출금의 상환을 연기하는 대통령 긴급명령을 내려서라도 기업 자금난을 완화해 줄 것을 건의하고 있다.

채무유보라는 또다른 극약처방까지 거론되는 현 시점은 정말 한국 경제의 사활 (死活) 이 걸린 시점이다.

슬기롭게 고비를 넘기느냐, 정말 파국으로 가느냐의 갈림길에 선 이 시점에서 자금 동원의 유효한 수단이자 난국 타개에 도움이 되는 처방을 동원하는데는 금기의 성역 (聖域) 을 둘 수 없다.

무기명 장기채를 발행하는 문제, 실명제를 당분간 유보하는 문제 등을 포함해 모든 실효성 있는 대책을 궁리해야 한다.

명분을 지킨다고 이 대책 저 대책 다 놓치는 우 (愚) 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전임 경제부총리도 이른바 도강세 (渡江稅) 만으로 과거를 묻지 않는 보완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정부 하기나름에 따라 정치권과 재계의 슬기를 한군데로 묶는 현명한 합의도출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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