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세 섬나라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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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가 드디어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실무 협의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이같은 급박한 상황의 진전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심정은 자못 착잡한 것 같다.

경제에 대한 신탁통치를 받게 됐다며 비분강개하는 얘기도 들린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잠깐 숨을 돌리고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1976년의 영국, 1984년의 뉴질랜드, 1992년의 페로 (Faeroe) 군도 등 세 섬나라의 경우가 그것이다.

첫째는 1976년의 영국. 당시 캘러헌이 이끄는 노동당 정부는 성장률 악화.인플레 심화.대외채무 증대의 심각한 경제난국에 직면했다.

파운드화 가치의 급격한 하락과 외환보유고의 고갈사태로 국가경제가 부도 직전의 급박한 상황에 몰리게 됐다.

결국 영국정부는 대영제국의 명예와 애덤 스미스.케인스 등 경제학 거봉들을 배출한 자존심을 누르고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됐다.

IMF와의 협의 결과 12월15일 엄청난 재정긴축계획을 포함한 의향서 (letter of intent)가 작성되고 전체 규모 39억달러에 이르는 지원액이 결정됐다.

그러나 이러한 IMF의 자금지원과 이에 따른 대폭적인 구조조정을 거치면서도 영국 경제는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1979년 보수당의 대처수상이 등장해 이른바 '대처혁명' 의 과정을 겪게 된다.

둘째는 1984년의 뉴질랜드. 그해 7월14일의 선거를 앞두고 뉴질랜드 경제는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경제성장은 급락하고 경상수지 적자와 대외채무는 국내총생산 (GDP) 의 9%와 95%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외환시장에서 급락하는 뉴질랜드 화폐가치를 방어하기 위한 중앙은행의 싸움은 외환보유고의 고갈을 재촉하고 있었다.

급기야 선거 다음날 중앙은행은 외환시장을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이와같은 극한상황에서 뉴질랜드는 IMF 등에 구원의 손길을 뻗지 않고 새로 집권한 노동당이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초강도의 개혁프로그램을 추진하게 됐다.

일단의 개혁 지도자에 의한 눈물겨운 스스로의 개혁과정을 거쳐 뉴질랜드는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최하위권 경제에서 10여년이 지난 지금 최상위권 경제로 탈바꿈했다.

셋째는 1992년의 페로군도. 페로군도는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나라다.

영국과 아이슬란드 사이에 위치한 인구 5만명의 소국이나 총리와 7명의 장관이 있는 어업중심의 버젓한 독립국가다.

1950년 덴마크로부터 독립한 후 종주국이던 덴마크보다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해 왔으나 1990년대 들어 방만한 재정운용과 주산업인 어업의 타격으로 경제가 파탄에 직면하게 됐다.

1992년에는 순외채만도 GDP의 1.4배에 이르게 됐고 급기야 덴마크에 긴급자금을 요청하게 됐다.

덴마크는 직접 지원을 거절하고 IMF의 안정화 프로그램을 따라야만 지원하겠다고 몰아댔다.

이에 따라 그해 12월1일 필자를 포함한 세명의 IMF 협의단이 페로군도에 입국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작업에 착수하게 됐다.

당시 GDP의 10% 수준이던 재정적자를 다음해에 흑자로 반전시키는 등 강력한 긴축을 시도해 페로경제는 다소 회복 기미를 보였으나 그후 지도층의 무분별과 비협조로 아직도 경제는 난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 세나라의 경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지나친 자기 비하 (卑下) 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국을 비롯한 선진국들도 필요할때 IMF에 의존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둘째, IMF의 지원을 받더라도 궁극적인 문제 해결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한다.

뉴질랜드 사례가, 그리고 IMF 지원 이후의 영국 사례가 그것을 웅변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셋째, 올바른 지도자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페로군도의 실패는 지도자의 잘못에 기인하나 영국 경제의 회복과 뉴질랜드 경제의 약진은 강력하고 현명한 지도자의 역량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한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대선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다.

국민의 현명한 판단과 선택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이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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