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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문 굳게 잠근 대원군 시대착오적 ‘목탄 군함’ 만들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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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흥선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권좌에 오를 무렵 왕조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위태위태했다. 나라 안에서는 세금을 줄여 달라는 죽창 든 백성들의 아우성이 자자했으며, 바깥에서는 닫힌 빗장을 열라는 서구 열강의 쩌렁쩌렁한 호령이 울려 퍼졌다. 정치가로서 그의 성패는 당면한 외우내환을 어떻게 막아내는가에 달려 있었다. 오늘날 그는 조선왕조를 중흥한 개혁정치가이자 외세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킨 원(原)민족주의자(proto-nationalist)라는 칭송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산 이들의 기억은 사뭇 다르다.

대쪽 같던 선비 황현은 그의 국내정치를 “공연히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사색당파를 두둔해 백성들에게 원한을 샀을 뿐”이라고 깎아 내린다. “이 악독한 사람이 잠깐 사이에 만들어 내는 환란을 우리가 면할는지 나는 마음을 놓지 못하겠습니다.” 프랑스 선교사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는 다른 세상을 꿈꾼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동학교도와 천주교인을 죽인 독재자이자 일본과 중국이 양무운동과 명치유신을 단행해 서구문물을 배우고 익힐 때 우물 안 개구리로 시간을 허송한 시대착오적 정치가였다.

“몸이 과히 크지 않고 파리하나 원기가 있으며, 그 눈은 항상 번득번득하여 보기에 무섭다.” 선교사가 묘사한 대원군(사진)의 생김새에 고개가 절로 끄떡여진다. 중국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톈진(天津)에 잡혀 있던 1882년에서 1885년 사이에 찍은 사진이다.

“대원군이 맘만 먹으면 개혁이 성공할 수 있다”던 김옥균의 말마따나 우리는 실패의 역사를 쓰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가 취했어야 할 시의적절한 정책은 개방과 개혁이었다. 그러나 그는 쇄국의 문을 더욱 굳게 걸어 잠갔으며, 민란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만 세금을 깎는 등 미봉책을 일삼았다. 대원군 치세의 조선과 오늘의 북한은 개혁과 개방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눈 가리고 귀 막는다는 점에서 너무도 닮은꼴이다. 나라를 튼튼히 하는 제일보는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는 어진 정치에 있다는 맹자의 말마따나 대원군이 해야 했던 일은 견갑이병(堅甲利兵) 갖추기가 아니었다. “배를 물에 띄우고 불을 댕겨 가기를 재촉했으나 배의 운행이 극히 더디어 한 시간 동안 겨우 십여 보를 떠갔다.” 대원군이 서구 군함을 흉내 내 만든 목탄(木炭) 전함의 성능을 비꼬는 박제형의 비웃음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원폭과 미사일만으로는 흔들리는 체제를 지킬 수 없음을 김정일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