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복거일의 ‘칼날’ 부드러워졌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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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서정적 풍경,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
 복거일 지음, 조이스 진 그림
북마크, 204쪽, 1만3000원

글은 따뜻했다. 행간에서 배어나오는 깊이 있는 사유는 가쁜 숨으로 지나치기보다 눅진하게 찬찬히 책장을 넘기게 했다. 저자는 소설가이자 사회평론가인 복거일. 그의 이름은 냉철하고 예리한 칼럼니스트 쪽에 가깝다. 게다가 그의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와 평론집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의 독자로, 그가 이렇게 폭신폭신한 글을 내놓을 줄 예상치 못 했다.

책은 일상의 사소한 일들부터 현실의 복잡 다단한 문제, 삶과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까지 포괄하는 그의 산문을 엮었다. 하지만 책에 서정성을 부여하는 장치는 그가 소개하는 시(詩)다. 그는 머리글에서 “독자들이 수필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시를 음미할 기회가 나오도록 마음을 썼다”고 밝혔다. 시는 때로는 아련하게, 가끔은 먹먹하게 마음을 울리며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진폭을 키운다. 그렇지만 그가 읊어주는 시가 그리 한가하지는 않다. 한동안 신문 지면을 도배했던 ‘바다이야기’ 사건을 말하려고 이형기의 시 ‘반딧불’을 끌어들인다. 안락사 논쟁을 지켜보면서는 ‘이 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여유있는 하직은/얼마나 아름다우랴.’는 목월의 시 ‘난(蘭)’을 통해 에둘러 생각을 드러낸다. 우리가 잊고 있을 뿐, 시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저자의 메시지는 이 부분에 담겨 있는 듯하다. “우리의 삶은 물기가 너무 없어졌다. 이젠 삶에 최소한의 여유를 주어 너무 메마르지 않도록 할 때가 됐다 (…) 고개 숙여 험한 길을 살피면서도, 우리는 때로 고개 들어 높은 곳도 살펴야 한다. 아직 너르게 비어 있는 하늘 속으로 봉우리들이 솟았고 그 위에 별들이 빛나고 있음을. 그리고 사람 사는 곳마다 꿈과 이상이 있음을, 우리는 가끔 스스로에게 일러야 한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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