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위대한 사상 정당한 평가는 출판인의 의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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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좌익 학생들은 교무실로 쳐들어 왔다. 우익 분자를 처단한다며 달려든 어린 학생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 감은 채 어린 놈들의 발길질을 견뎠다. 하지만 보면 안 된다. 저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안 된다. 어차피 다시 가르쳐야 할 녀석들, 감정이 생기면 어찌 제자로 다시 대할 수 있겠나.

함석헌(1901~1989), 그가 해방 뒤 이북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 겪은 일이다. 평양고보 시절 3·1운동의 주동자, 북한에선 공산정권에 대한 고발자, 남한에선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 운동가였던 함석헌. 기독교 사상가이자 비폭력 평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사상가의 위대함은 그의 글이나 말에서 언어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다. 그건 그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의 몸에 말없이 녹아, 어느 순간 믿기지 않는 숭고함의 어떤 정점으로 표현된다. 선생의 서거 20주기를 맞아 『함석헌 저작집』(전 30권, 한길사, 46만원)이 나왔다. 총 1만1510쪽에 이른다. 어마어마한 사상의 무게다.

이 ‘역사’를 감행한 이는 한길사의 김언호(64) 대표이사. 함석헌과 시대를 함께 살지 못한 이들이 보기엔 무모한 출판이기도 했다. 김 대표는 말한다. “한국에는 사상이 없다고 말하지 말고, 우리의 위대한 정신적 저작자들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자. 그건 출판인의 의무다.” 한길사는 1980년부터 선생의 서거 1년 전까지 『함석헌 전집』 전 20권을 내놓은 바 있다. 이번 저작집 30권엔 그 뒤 새로 발굴된 시 72편, 강연문 26편 등 책 7권 분량의 원고가 추가됐다. 기존 전집에 몇 권 더 얹은 게 아니다. 편집을 완전히 새로 하고, 주석을 달고,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인용된 말들의 출전을 일일이 찾았다.  

김 대표는 “일본은 자기 사상가들의 전집을 주기적으로 재간행한다. 한국은 재간행은커녕 정리도 안 해준다.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사상가를 낳지 못한 게 아니라, 시대가 키운 인물을 후세가 죽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 대표는 함석헌을 기독교 사상가나 민주화 투사로만 기억해 종교사나 과거사에 묻어 둬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의 생명사상은 환경위기의 시대에 선구적 시야를 지녔고, 평화사상은 지금도 세계사적 울림을 갖는다. 그리고 문학적으로도 그는 영원한 시인이다. 헌책방의 귀퉁이나 도서관의 분류기호 속에 이 사상가를 가둬 놓을 수 없는 이유다.

글·사진=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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