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짧아 황홀한 봄, 늦기 전에 맛보시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9면

때로는 실소를 자아내고 때로는 비장하다. 푸근한 우리말과 낯선 한자어, 한시(漢詩)와 동·서양 미술에 대한 폭넓은 지식 등이 녹아든 글은 한상 잘 차려낸 남도 밥상처럼 맛깔스럽다.

스테디셀러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를 낸 미술 칼럼니스트로 이름난 손철주씨는 신문사 미술기자로도 필명을 떨쳤다. [중앙포토]

문화재·미술 전문출판사 ‘학고재’ 주간인 손철주(55)씨가 펴낸 에세이 모음집 『꽃피는 삶에 홀리다』(생각의 나무)는 깊이 있으면서도 감각적이다. 수 십 년간 신문사와 문화단체 등에서 일하며 읽힌 감칠맛 나는 글쓰기 솜씨로 예술과 풍류를 풀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손씨가 이런저런 지면에 발표했던 짧은 글 50꼭지가 ‘꽃피는 삶에 홀리다’ ‘사람의 향기에 취하다’ ‘봄날의 상사를 누가 말리랴’ 등 3부로 나뉘어 묶였다.

1부 ‘꽃피는…’은 중년 남성들의 세월 한탄, 예쁜 남자 선호 세태 와 만년필, 마라톤, 식도락 등 신변잡사에 대한 글을 모았다. 2부 ‘사람의 향기…’는 시바 료타로·이병주·김용준 등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들에 대한 회고적 성격의 애정 고백이다. 3부 ‘봄날의…’에서는 보다 본격적인 미술 에세이를 만날 수 있다.

거칠게 3부로 나눠 놓았을 뿐 계통이 없기 때문에 손가는 대로 펼쳐 읽어도 무방할 듯 싶다. 웃음이 필요하다면 ‘묘약을 어디서 구하랴’가 제격이다. 사무실을 옮기던 지은이는 수 년 간 선물받은 각종 약을 모아 둔 보따리를 발견한다. 북한산 ‘다시마 알’을 보곤 “다시마에 무슨 알이 있을까 보냐” 중얼거리다 방사선 피해까지 방지하는 효능이 있다는 설명서를 읽고는 북한이 병주고 약준다고 푸념한다.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 또는 핵 원자로 가동 재개 등을 비꼰 것이다.

“한낮의 바다를 지배하던 에메랄드와 코발트블루는 생생한 실존이다…그러나 스러지는 태양 아래에서 바다는 색깔을 바꾼다…그 색들은 형상의 끈질긴 구체성을 모호하기 짝이 없는 추상으로 내몬다. 석양은 이리하여, 형상의 정체성을 앗아버리는 시간의 수작이다. 시간의 거리낌 없는 농단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쪽빛 바다에 떠도는 한 조각 붉은 마음’에서 인용한 대목은 아무래도 ‘비장’쪽이다. 소설가 김훈류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책의 주된 정서는 ‘꽃은 피고 지고’에서 소개한 조선 선조대의 문장가 송한필의 오언시에서 찾아진다. “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지네/가련하다, 한 해의 봄날이여/오고감이 비바람에 달렸구나”

손씨는 “쉬운 언어에 담긴 통속성이 오히려 간곡한 미감을 풍긴다”고 풀이한다. 그러고 보니 책의 머릿말에서는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삶은 이운다. 짧아서 황홀하다, 말하고 싶다”고 했다. 봄의 열락, 늦기 전에 맛보라고 손씨가 손짓한다.

신준봉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