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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할머니는 연금이 싫다,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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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독 끓이는 여자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김인순 옮김
솔, 252쪽, 9500원

최근 북유럽 소설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출판사 ‘행간’이 노르웨이 작가 안네 락데의 장편소설 『베를린 포플러 나무』를 이번 달 출간했고 ‘은행나무’는 덴마크 작가 크리스티안 뫼르크의 장편 『달링, 짐』을 준비 중이다.

은행나무의 이진희 편집부장은 “미국·일본 소설에 비해 색다르고 작가들 몸값도 높지 않아 출판사들이 북유럽 소설에 손대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 역시 북유럽의 핀란드 소설이다. 작가(67)는 핀란드 독자들이 가을이면 그의 신작을 기다릴 정도로 인기라고 한다. 사우나·독주 등과 함께 그의 소설을 읽으며 혹독하게 춥고 기나긴 북구의 겨울밤을 견딘다는 것이다.

소설은 그런 ‘풍문’대로 겨울 밤 따뜻한 방구들에서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 이야기 같다. 주인공은 육군 장교의 미망인 린네아 라바스카. 소설 속 한바탕 만화경 같은 연쇄 사건이 벌어진 1988년, 일흔 여덟 살의 노인인 라바스카는 처음에는 곱게 늙은 귀부인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그녀는 한 달에 한 차례 5000마르크의 연금을 받는 날이 죽기보다 싫다. 그녀가 사는 하르미스토 마을에서 50㎞ 떨어진 헬싱키에서 ‘천하의 악당’인 외조카 카우코 뉘쇠넨이 꼬박꼬박 이를 수금하러 오기 때문이다.

서른 살인 카우코와 그의 악당 친구들인 스물 다섯 살 페르티 라흐텔라, 갓 스무 살인 야리 파게르스트룀 등 셋의 악행은 끔찍할 정도다. 절도나 폭력 행사는 기본, 라흐텔라와 파게르스트룀은 술김·홧김이긴 하지만 각각 사람을 죽인 적도 있다. 그러니 이들의 수금 행사가 곱게 돈만 받아가는 것으로 끝날 리 없다. 라바스카는 사나흘씩 이어지는 이들의 잔치를 위해 사우나 준비를 해두어야 하고 없는 살림 탈탈 털어 음식·술도 사 날라야 한다. 온갖 수고를 다했는데도 돌아오는 건 감춰둔 재산 내놓으라는 협박뿐이다.

라바스카는 그러나 가련한 희생자가 아니다. 남편이 살아 있었다면 일당을 개처럼 쏴 죽였을 거라고 상상하며 자신의 집을 탈출, 복수를 계획한다. 여자에게 화장은 군인이 무장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지론에 따라 말끔하게 몸 단장을 마친 채.

여기까지가 소설의 5분의 1쯤이다. 추리소설 같기도, 007 영화 같기도 한 라바스카의 복수극은 직접 확인하시라.

소설의 미덕은 이야기 줄거리의 재미에만 있지 않다. 곳곳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씁쓸한 블랙유머, 아이러니가 오히려 감칠 맛 난다. 평론가 김준오는 작가와 똑똑한 독자가 공모해 소설 속 바보 같은 인물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도록 하는 장치가 아이러니라고 정리한 바 있다. 작가의 시선이 미치는 아둔한 인간 군상에는 라바스카까지 포함된다. 작가와 등장인물들과의 그런 거리감으로 인해 소설은 이야기 같기도, 동화 같기도 하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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