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 15번째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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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시를 못쓰는 날은/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깎어주자. /훈장 (訓長)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깎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이/아내 손톱밑에 아직도 떠오르는/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

미당 (未堂) 서정주 (徐廷柱.82) 시인이 15번째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 를 최근 펴냈다 (시와시학사 刊) .1993년 펴낸 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 이후 쓴 신작시 44편이 모였으니 고령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현역 시인' 의 면모를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미당은 위 시 '늙은 사내의 시' 전문에 보이듯 요즘 시 쓰는 틈틈이 '할망구' 아내의 손.발톱을 깎아주며 '마음 달래며' 살고 있다.

'손톱' 은 미당 시력 60여년를 관통하는 핵이다.

초기시에서는 육욕에 헉헉 숨너머가게 하는 가시내의 관능적 손톱이었다가 중기에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의 국화꽃 같은 손톱을 거쳐갔다.

그리고 그 손톱은 다시 날으는 새도 비켜가는 초승달 같은 우주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 전하는 것으로 됐다.

미당에게 있어서 '손톱' 은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룩해놓은 한국 최고의 시 자체인 것이다.

"시라는 것, 이것은 말하자면 절입태산 (浙入泰山) 인 것이다.

오래 쓸수록 깊은 산골 속의 애로들만 더 첩첩히 많이 겪어야하는 것인 만치. 이걸 또 한 권 내는 현재의 내 심경은 미련하게 늙은 숫소 한마리가 어느 마당가에서 그 먹은 풀들을 거듭거듭 되뱉어내 되새김질 하고 있는 꼬락서니만 같이 느껴질 뿐이다.

" 이번 시집을 내며 밝힌 미당의 시관이다.

하는 말만 그대로 옮기면 그대로 시가 될 정도의 '시선 (詩仙)' 미당에게도 시 쓰기의 어려움은 첩첩산중이다.

주르륵 써내려간듯한 천의무봉의 시도 대학노트에 깨알같이 쓰고 고치고 고쳐진 다음 나온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때/나는 열두살이었는데요. /우리 이쁜 여선생님을/너무나 좋아해서요. /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깎고, /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 /그러면서 산에가선 산돌을 줏어다가/국화밭에 놓아두고/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 " '80 소년 떠돌이의 시' 에는 위 시 '첫사랑의 시' 같이 소년적 시선과 어조의 시들이 많이 들어 있다.

그 어린 해맑은 시선은 그러나 어마어마한 우주의 비밀을 채우고 있다.

예의 '손톱' 이 이 시에서도 나온다.

'국화밭' 도 나오고. 그리고 미당 시 비밀의 열쇄인 '산돌' 이 슬며시 끼어든다.

'첫째를 노려서' 하는 지극정성이면 하찮은 산돌같은 것도 세상 최고로 좋고 이쁜 여선생의 '손톱' 이 된다.

이렇듯 미당의 시에서는 모든 것들은 따로따로 존재하지않고 끊임없이 다른 무엇 무엇으로 되어간다.

그러면서 영생을 누리는 우주적 생명이 된다.

"대구의 시인 서지월 (徐芝月) 이가/ "자셔보이소" 하며/저희집에서 딴 홍시들을 가져왔기에/보니 거기엔/山까치가/그 부리로 쪼아먹은/흔적이 있는 것도 보여서/나는 그걸 골라 먹으며/이런 논아먹음이/너무나 좋아/웃어자치고 있었다."

시 '서지월이의 홍시' 를 보면 제자 시인 서지월씨가 보낸 홍시를 고맙고 맛있게 먹는 풍경이 우선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러나 그대로 읽어버리면 안될, 그 어느 종교.사상도 풀수 없는 우주관이 들어있다.

산까치와 내가 함께 '논아먹음' .이 나누어 먹음으로써 까치는 내가 되고 나는 다시 홍시가 되어 '웃어자칠수' 있는 삼라만상의 조응. 그 세계에는 나와 대상, 순간과 영원, 삶과 죽음의 구분이 없다.

시의 세계는 영원히 푸르고 드넓은데 육신은 고달픈지 미당은 인터뷰를 좀체 사양하고 있다.

그리고 며칠후 아들 의사가 있는 미국으로 가 건강체크도 하고 쉬고 올 예정이다.

그런 미당이 이번 시집 머리에 올린 영원 자체인 시 '당명왕과 양귀비와 모란꽃이' 를 읽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한국인의 보람일 것이다.

"당명왕과/양귀비와/모란꽃이/어느날/함께/열반 극락에 들어가 보자고/하늘로 하늘로 솟아올라 갔는데, //당명왕과 양귀비는/구름 엉킨 언저리에서/동침 (同寢) 하고 싶어/다시 땅으로 내려와/방으로 들어가버리고. //모란꽃은 시들어 떠러져서/그 꽃빛만이 더높이 날아올라서/해와 달과 별들 옆을 감돌고 있었는데, //그 마음씨만은 아주나 自由라놓아서/그 빛깔까지 다 벗어 던져버리고/색계 (色界) 와 무색계 (無色界) 넘어/열반에 들어 자취도 없이 앉어계신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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