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로잡은 테마]평화 연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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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92년 하와이대학에서 '갈등 해결' 이라는 강좌를 들었을 때다.

유럽 출신 교수의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 쩔쩔매며 매주 내주는 과제물 제출에 소홀했더니 2주만에 그 과목을 포기하라는 위협적 요구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요한 갈퉁이란 이 교수의 세계적 명성 때문에 그 과목을 신청하였던 터라 최선을 다 해보겠다며 버텼다.

3주째 숙제는 '세사람 앞에 놓인 두개의 오렌지' 라는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풀어보라는 것이었다.

한주 동안 골똘히 궁리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써냈다.

'가위 바위 보' 나 '제비뽑기' 로 두사람이 하나씩 가질 수도 있고 공평하게 3분의 2씩 나누어 먹을 수도 있다.

오렌지를 돈이나 다른 과일 세개로 바꾸든지 즙이나 쥬스로 만든다면 더 쉽게 셋이 나누어 가질 수도 있다.

과제물을 낸 결과 그는 나를 '영어도 못 알아듣는 문제학생' 에서 '창조적인 발상을 가진 똑똑한 학생' 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그후 하와이에 들를 때마다 나를 집으로 초대했으며,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한달에 한두번씩 나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다.

내가 그를 따라 평화 연구의 전도사가 된 동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사회가 지금까지 염원해온 목표 가운데 평화만큼 절실한게 있을까. 특히 한반도에서는 이데올로기 대립이 여전히 지속되는 가운데 한국전쟁이라는 열전도 아직 매듭짓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서구에서는 60년대부터 평화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분야로 발전돼 왔다.

일반적으로 정치학이나 국제관계학에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라는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 라 정의한다.

하지만 평화학에서는 그런 폭력의 원인까지 제거된 상태를 말한다.

갈등이나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차별같은 간접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이 존재하는 한 진정한 평화가 실현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나는 또한 평화학을 공부함으로써 인권운동은 물론 여성운동.환경운동에도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없어지지 않고서는 평화로운 사회가 이룩될 수 없으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이 그치지 않는다면 진정한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데모없는 날이 없었던 80년대초에 대학을 다닐 때는 데모 한번 참여하지 않았던 20대의 '모범생' 이 이제는 학생들의 데모를 부추기는 40대의 '문제교수' 로 변신하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와 관련해 평화학에서는 평화를 추구하는 과정 역시 반드시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폭력이 일시적으로 평화를 가져올 수는 있어도 폭력으로 평화를 영원히 지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재봉 <원광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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