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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박정희시대]30.자위에서 자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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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이 핵개발을 시작한 동기는 예기치 않은 미국의 주한미군 철군 통보였다.

북한에 비해 군사력에서 절대 열세였던 시절이었기에 국민들은 위기감에 사로잡혔고 박정희는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핵개발은 미국의 보호막에 안주해 있던 한국의 지도자에게 홀로서기의 필요성을 절감케 했다.

69년 7월 리처드 닉슨 미대통령이 괌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의 손으로" 라는 선언을 했을 때만 해도 박정희는 반신반의했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전에 미군 다음으로 많은 5만명의 병력을 파견, 피를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다.

1년 뒤인 70년 7월초 윌리엄 로저스 미국무장관은 사이공에서 개최된 베트남 참전국 회의에서 최규하 (崔圭夏.79) 당시 외무장관에게 '주한미군 2만명 철수' 를 통고했다.

다음달에는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방한, 朴대통령에게 직접 통보했고 대만으로 가는 기내에서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할 것" 이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김정렴 (金正濂.73) 대통령비서실장이 이 소식을 보고하자 朴대통령은 굳은 자세로 말했다.

"임자, 일희일비해서는 안돼. 국방을 언제까지나 미군에 의존할 수는 없어. 이제는 스스로 나라를 지켜야 돼. "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철수 결정에 대해 박정희는 몹시 분노했다.

그는 문득 미국 태도에 괘씸한 생각이 들 때면 측근들에게 여과없이 감정을 표출하곤 했다.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임방현 (林芳鉉.67) 씨의 증언. "朴대통령은 미국이 자꾸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거론하자 '미국놈들, 걸핏하면 철군한다고 협박한다' 며 아주 불쾌해 했어요. 대통령이 말끝마다 '미국놈들' 이라고 말하니까 주한 미대사가 이것을 알아들을 정도였어요. " 그러나 미국은 박정희의 감정이나 한국민의 불안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정대로 71년 3월 주한 미7사단은 철수했다.

박정희가 핵개발을 결심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국방과학연구소 (ADD)에서 핵폭탄 설계 연구책임자로 일한 A씨는 71년 4월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박정희의 결심을 들었다.

"우리도 이제 초 (超) 무기를 만들어야겠어요. 이건 숨어서 해야 합니다. "

초무기는 화생방 무기를 뜻하는 것이지만, A씨는 "朴대통령이 '숨어서 하라' 고 일러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핵무기였다" 고 증언했다.

핵개발은 71년 11월 청와대에 경제2수석실이 생겨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경제2수석실은 방위산업을 전담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서였지만 이후 중화학공업 육성.행정수도 건설 추진등 박정희시대의 굵직굵직한 주요 사업을 전담한 일종의 '태스크 포스팀 (기동타격대)' 역할을 했다.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씨가 책임자였고, 김광모 (金光模.64.테크노서비스 사장) 비서관이 핵심 참모였다.

金씨의 증언. "吳수석에게 들은 얘기입니다.

朴대통령이 경제2수석실이 만들어진지 얼마 안돼 吳수석을 부르더니 '주한미군 철수로 한국의 안보가 대단히 불안해. 미국한테 밤낮 눌려서 안되겠어. 언제는 도와준다고 했다가 이제 와서는 철군해버리니 언제까지 미국한테 괄시만 받아야 하는지…. 이제는 좀 미국의 안보 우산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 약소국가로서 큰소리칠 수 있는 게 뭐 없겠소. 인도와 파키스탄 같은 나라도 큰소리를 뻥뻥 치고 있는데 말이야. 우리도 핵개발을 할 수 있는거요' 하고 묻더랍니다.

" 朴대통령의 의중을 알아차린 이들은 즉시 최형섭 (崔亨燮.77.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 과학기술처장관에게 핵개발 가능성을 물어봤고, 구체적 사항은 崔장관의 양해를 얻어 윤용구 (尹容九.69.동원공전 학장) 원자력연구소장에게 조사시켰다.

그러나 당시 우리 과학자들은 핵개발의 기초지식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했다고 한다.

계속되는 金씨의 증언. "처음에 尹소장 얘기가 핵탄두용 플루토늄을 얻기 위해서는 중수로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 를 재처리해야지 경수로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 는 순도가 낮기 때문에 안된다고 합디다.

우리는 그런줄 알았어요. 얼마 후에는 경수로에서 나오는 연료를 재처리해도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하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왜 왔다 갔다 하느냐' 고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국제원자력기구 (IAEA) 의 감시 때문에 경수로든 중수로든 '사용후 핵연료' 를 재처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어요. " 실제로 상업용 원전에서 타고 나온 핵연료를 재처리해 얻은 플루토늄은 핵폭탄 제조 원료로는 적합하지 않다.

원자력연구소 연구실장으로 재처리사업의 실무책임자였던 김철 (金哲.59.아주대 대학원장) 박사는 "경수로는 한번 핵연료를 집어넣으면 3년간 타기 때문에 순도가 낮아져 재처리해도 핵폭탄용 원료로 부적합하다.

중수로의 경우 1년 정도 탄 핵연료를 꺼내 재처리하면 가능한데 IAEA의 감시가 심해 '사용후 핵연료' 를 확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고 말했다.

金씨는 "70년대 후반 연구용 원자로 (NRX) 를 도입하려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고 배경을 설명했다.

인도는 캐나다로부터 사들인 연구용 원자로를 이용해 '사용후 핵연료' 를 확보, 이를 재처리해 74년 5월 지하핵실험에 성공했던 것이다.

경제2수석실은 연구용 원자로의 원료인 천연우라늄을 확보하기 위해 자원연구소로 하여금 충북괴산에 있는 우라늄광의 경제성을 조사케하는 한편 우라늄 광석을 캐 70~80%의 우라늄 함량을 지닌 우라늄정광 (옐로 케이크) 을 만들어 朴대통령에게 보여준 적도 있다.

이 무렵 朴대통령이 사용하는 용어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미7사단 철군후에 '자력방위' 의 준말인 '자위 (自衛)' 라는 단어를 많이 썼는데 72년 중반부터는 '자위' 대신 '자주국방' 이라는 용어만을 사용했다.

오원철씨의 설명. " '자위' 라는 용어는 북한의 공격에 대한 방위개념이에요. 그러나 '자주국방' 은 대미 (對美) 관계까지 포함한 국방의 자주성을 말합니다.

국방의 자주화는 한국의 자주화로 발전해 나가게 되죠. 단순한 용어상의 문제를 넘어선 매우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 朴대통령은 72년 7월20일 국방대학원 졸업식 치사에서 자주국방의 의미를 직접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우리 국민이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의연한 자세로 강력히 추진할 때, 그리고 미국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끝내 해낼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줄 때 비로소 미국은 협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국방입니다.

"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일을 의연한 자세로 강력히 추진한다' 는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이 말 속에는 방위산업 육성과 더 나아가 핵개발에 대한 박정희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국가안보문제를 미국에 구걸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핵개발 계획은 73년 겨울에 접어들면서 보다 구체화했다.

핵무기 개발 극비계획서가 보고됐다.

핵폭탄 설계 연구책임자였던 A씨의 증언. "20장 분량의 차트 형식으로 만들어진 계획서에는 핵무기의 기본개념에서부터 소요예산 (약 15억~20억달러).개발완료 예상기간 (6~10년)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朴대통령은 보고에 만족, 기분좋게 차트 위에 사인을 해주셨어요. " A씨에 따르면 81년 수출목표 1백억달러 (실제로는 77년 달성) 의 15~20%를 핵개발비에 투자한다 해도 국민경제에 큰 부담이 안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A씨가 계획한 핵폭탄은 2차세계대전말 일본 나가사키 (長崎)에 투하된 것과 같은 20㏏짜리 플루토늄탄으로, 투하방식은 공중투하식이었다.

"초기에 계획한 핵폭탄의 파괴력은 서울 광화문 네거리 상공 5백80m 위치에서 터뜨릴 경우 교문리 일대까지 잿더미로 만들고, 최소한 2백만명의 인명을 살상하는 정도의 규모였어요. 내가 75년초 국방과학연구소를 물러날 때 이미 핵폭탄 설계는 거의 끝마친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 이후 핵폭탄 제조와 기폭 (起爆) 기술은 우리 연구진이 프랑스 발둑에 있는 핵폭탄제조연구소등에서 계속 연구했다.

그러나 핵무기 개발 계획은 78년 9월 사정거리 1백80㎞의 '백곰'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함으로써 공중투하식이 아니라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인도의 네루, 프랑스의 드골과 같이 핵개발로 민족의 영웅이 되려는 박정희의 꿈은 무르익어갔다.

꿈을 실현시킬 두뇌가 절실히 필요했다.

박정희는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핵과학자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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