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안중근 의사 순국 99년 … ‘뤼순 감옥’재판소를 가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감방엔 ‘위국헌신 군인본분’ 썼던 책상이 …

사형 집행 직전의 안중근 의사. [연합뉴스]

“여기는 조선의 애국지사 안중근이 수감됐던 감방입니다. ‘동양평화론’도 이곳에서 집필하셨습니다. 안 의사는 정의를 위해 희생되셨습니다.”

24일 오후 중국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샹양(向陽)거리에 있는 ‘뤼순 일아(日俄)감옥 구지(舊址) 박물관’. 원래는 안중근(安重根·1879~1910년) 의사가 옥고를 치르고 숨진 뤼순감옥이었다. 박물관 안에는 안 의사가 숨진 교수형실 등 마지막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안내원은 안 의사가 갇혀 있던 감방에 이르자 이같이 말하면서 감방의 벽면에 새겨진 동판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안 의사의 사진과 함께 한국어·중국어·영어·일본어·러시아어로 안 의사의 인적 사항, 업적이 상세하게 기술돼 있었다. 좁은 창문 틈 사이로 감방 내부를 들여다봤다. 16.5㎡(5평)도 안 돼 보였다. 가까스로 햇살이 비치는 감방 한쪽에는 책상이 있고, 그 위에 붓·먹·벼루·종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안 의사는 이곳에서 300편가량의 유묵을 남겼다.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등도 썼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저격했다. 그러곤 144일 동안 이곳에서 옥고를 치른 후 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중국 정부는 항일 애국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71년 박물관으로 개조했다. 안 의사의 순국 99주년과 의거 100주년(10월 26일)을 맞아 뤼순감옥과 뤼순관동법원 현장을 취재했다. 뤼순=장세정 특파원

뤼순 감옥·재판소 현장을 가다

“여기서 동양평화론 집필” … 박물관엔 5개어로 업적 새겨
안 의사 최후 맞은 장소, 항일 전시관으로
“이르면 6~7월 외국인에 완전 개방될 예정”

뤼순 감옥이던 ‘뤼순 일아(日俄) 감옥 구지(舊址) 박물관’은 중세 서양 양식의 흰색 건축물이었다. 가까이 갈수록 사람을 압도할 듯 다가왔다. 뤼순 감옥은 1898년 뤼순과 다롄(大連)을 강제로 차지한 제정 러시아가 1902년 착공했다. 그러다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7년 최대 2000명의 죄수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확장했다. 감옥의 총면적은 22만6000㎡. 그중 4m 높이의 담장으로 725m를 둘러싼 수감 시설 면적은 2만6000㎡다. 이 감옥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사용됐다.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수많은 항일 인사가 이곳에 투옥돼 고문을 당했다.

①중국 다롄(大連)시 ‘뤼순 일아(日俄) 감옥 구지(舊址) 박물관’ 전경. 원래는 뤼순 감옥이었다. ②안중근 의사. ③안 의사가 일제 주도로 재판을 받았던 옛 뤼순 일본관동법원 건물. ④안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8발의 총알 중 한 개. 당시 이토를 수행했던 남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의 왼쪽 다리를 관통한 것이다. 안 의사 재판에서 증거로 사용됐다. 현재 일본 헌정기념관 내부 전시실에 보관돼 있다. [뤼순=장세정 특파원, 도쿄=김동호 특파원]


돔형의 건물 정문을 들어서자 중국인 관람객들이 25위안(약 5000원)을 내고 입장권을 사고 있었다. 안내원을 따라 감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벽돌 건물 내부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감방 통로를 10여m 걸어 들어가니 살결에 소름이 돋았다. 억울하게 숨져간 독립투사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 듯했다.

건물 밖에는 안 의사가 수감돼 있던 방이 있었다. 안내원은 “안 의사를 국사범으로 분류한 일본이 안 의사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감시하기 위해 간수장 바로 옆에 감방을 배치했다”고 설명했다. 뤼순 감옥에서 안 의사가 자취를 남긴 또 다른 현장은 최후를 맞이한 교수형실이었다. “항소하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하라”고 당부한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뜻을 받들어 안 의사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 의사는 교수형대에 섰다. 오전 10시10분쯤 안 의사는 의롭게 생을 마감했다. 천주교 영세명은 토마스. 나이는 불과 31세였다. 안 의사는 “나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잠시 묻어뒀다가 독립하면 조국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일제는 안 의사의 유해를 유가족에게 인도하길 거부했다. 그래서 그의 유해는 아직도 차디찬 뤼순 땅 어딘가에 묻힌 채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당시 고문때 사용했던 전기 의자.

안 의사가 최후를 맞은 장소는 그 후 감옥의 세탁소로 사용됐다. 박물관 측은 현재 이 자리를 일제 때 희생된 미국·러시아·이집트 등의 해외 항일 인사를 기리기 위한 전시관으로 개·보수하고 있다. 공사장 관계자는 “3일 착공해 6월께 완공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해군 기지가 있는 뤼순의 군사 기밀을 보호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뤼순 감옥을 내국인에게만 개방해왔다. 그러나 현지에서 만난 한 중국인은 “중국 중앙정부가 뤼순을 대외에 개방하기로 방침을 정해 이르면 6~7월께 뤼순 전역이 외국인에게도 완전 개방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안 의사의 의거 100주년(10월 26일)께에는 한국인들의 관람이 허용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뤼순 감옥에서 1㎞ 떨어진 뤼순 일본관동법원은 오랫동안 병원으로 사용돼 오던 건물이다. 한국 민간단체인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이 성금을 모아 그중 일부를 매입해 안중근 의사 관련 유물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층짜리 법원 건물에는 안 의사가 일제 검찰관에 맞섰던 대법정도 보존돼 있었다. 뤼순 법원 옛터 진열관의 자오중화(趙中華) 관장은 “피고인 자리는 동양 평화를 주창한 안 의사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서야 할 자리였다”고 말했다.

진열관에는 일제가 항일 독립투사를 고문하는 데 사용한 전기 고문의자와 맷돌처럼 생긴 인체파쇄기 등 잔혹한 도구와 장비들이 전시돼 있었다.

뤼순(랴오닝성)=장세정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