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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차범근 감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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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차범근 대통령.박찬호 국무총리' - 요즘 장안에 떠도는 시니컬한 우스갯 소리다.

정치.경제등 뭐하나 제대로 돼가는 구석이 없다보니 그럴 수밖에. 98프랑스월드컵 본선진출을 사실상 확정지은 차범근 (車範根.44) 축구 국가대표팀감독. 요즘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메이저리그의 박찬호가 '아메리칸 드림' 을 실현했다면 그는 이미 80년대 독일에서 '차붐' 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가는 곳마다 사인공세가 펼쳐진다.

앳된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종이를 내민다.

가위 '차범근 신드롬' 이다.

'스타선수' 에서 '스타감독' 으로 탈바꿈한 차범근. 평소 정직과 성실을 좌우명으로 수신제가 (修身齊家) 를 이룬 차감독이 이제 '축구평천하 (平天下)' 라는 더 큰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다.

그런 차감독을 서울동부이촌동 자택에서 만났다.

- 아직 두경기를 남겨두고 있지만 조1위로 98프랑스월드컵 본선진출을 사실상 확정지었는데 소감은.

"본선티켓이 손안에 들어온 지금 솔직히 기분이 매우 좋아요. 피곤한 줄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축구가 얼마나 국민들을 실망 시켰읍니까. 너무 창피해서 가까운 가족공원에도 가지 못했었지요. 지금은 만나는 사람마다 사인을 해달라고 조릅니다. "

- 요즘 차감독께서는 선수보다 인기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감이 잘 잡히지 않네요. 저는 지금까지 결코 인기를 얻으려고 한적이 없습니다.

늘 성실히 최선을 다하려고 애썼을 뿐입니다.

축구를 잘해서 어떻게 하면 국민에게 기쁨을 줄까를 생각했지요. 돈 가지고 할수 없는게 바로 축구입니다.

늘 선수들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느꼈어요. 정치인처럼 인기나 얻고자 했으면 그렇게는 안됐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좀더 축구를 잘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게 국민들의 인기를 얻게된 요인이 아닐까요. "

- 용병술의 귀재라는 얘기가 있는데요.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도 아니고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처럼 정석 플레이를 펼쳤을 뿐입니다.

다만 열심히 하는 가운데 플러스 알파가 있었다면 바로 저의 신앙생활입니다.

축구는 알면 알수록 어렵습니다.

이번 경우 상대팀을 한번, 두번 볼때마다 달랐어요. 우즈베키스탄을 이기기 위해 상대팀 경기 비디오를 열두번 이상 봤을 정도니까요. 계속해 비디오를 보면서 느낀대로 적고 이를 다시 컴퓨터 안에 그려넣었어요. 상대선수의 장.단점을 분석하고나니 비로소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지도자로서 선수들에겐 '이렇게 하면 승산이 있다' 고 설명해 주었어요. 그게 용병술이라면 용병술이겠지요. "

- 국가대표 감독이 된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초반입니다.

선수들과 감독사이에 신뢰가 형성되지 않아 내가 원하는대로 선수들이 움직이지 않았지요. 지금은 선수들이 잘 따라주고 있어요. 지시만 하는 지도자는 신뢰감을 주지 못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선수들이 1백% 믿고 따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선수들과 함께 뛰고 생활하면서 서로 신뢰감을 느꼈고 성적이 좋아지면서 더욱 돈독해졌지요. 그 시기는 아마 최종예선전이 시작되면서부터 일겁니다.

"

- 얘기를 독일 분데스리가로 옮겨보죠. 그 시절 가장 어려웠던게 무엇이었습니까.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시달리는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때 시달린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요. 솔직히 말해 운동이나 언어문제는 오히려 힘이 들지 않았어요. 당시 어떤 이는 선수 차범근을 데리고 다니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돈을 요구했어요. 그런가 하면 편지를 보내 욕하는 사람도 있고 '차범근에게 전화하면 교회를 지어줄 것' 이라는 황당한 소문도 들렸지요. "

- 독일생활 10년동안 무엇을 배웠습니까.

"정직과 성실히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독일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성실합니다.

'레겔' (규칙.규범) 을 지킬줄 알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땀 흘리고 애쓰면 좋은 결과가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스포츠도 마찬가지죠. 페어플레이를 해야 합니다.

독일인들은 스포츠를 즐기고 스포츠를 통해 레겔을 배웁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이며 특히 선수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기도 하지요. 선수.감독의 임무는 다르지만 누구나 땀흘리고 애쓰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요. 스포츠의 진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

- 불성실한 선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재능이 다소 떨어져도 '이 정도면 경기에 나갈수 있다' 고 판단되면 뛰게 합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매도 맞아요. 한번 자극을 주고 검증한 뒤 진퇴여부를 결정합니다.

고종수 (삼성) 는 매맞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나이만큼 맞았습니다.

매를 맞고도 참는다면 그대로 있는거고 참을수 없으면 나가야지요. "

- 독일 분데스리가 시절 차감독에게 가장 영향을 준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8명의 감독에게 지도받았습니다.

그중에서 레버쿠젠 감독이었던 네덜란드 출신의 리누스 미셸 (현재 FIFA기술위원) 감독을 가장 존경합니다.

실력도 있고 말에 책임을 질줄 아는 분입니다.

강직.대담하고 박학다식하며 자기본분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분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지요. 실리축구도 사실 이분에게 배운 것입니다.

저도 이분을 닮아가려고 노력합니다."

- 요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박찬호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차감독도 분데스리가 시절 황색돌풍을 불러일으켰는데요. 박찬호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그 당시는 TV중계가 되지않았으니 직접 비교하기 어렵겠지요. 제가 활약하던 모습을 국민들께 직접 보여주지 못해 안타까웠습니다.

박찬호같은 젊은이가 많이 나와줘야 합니다.

그게 경제력 못지않게 국력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찬호가 자랑스럽습니다."

- 독일에서 선수로 활동할 당시 수입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처음 분데스리가 프랑크푸르트팀에 진출할 당시 연봉 20만마르크 (당시 환율로 치면 4천만~5천만원) 를 받았습니다.

주전들의 평균연봉이죠. 지난 76년 신탁은행 시절 (공군입대전 두달간 근무) 받은 월봉 6만8천원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큰 돈입니다.

이 돈으로 세금.보험료등을 내고 숟가락등 세간살이도 구입했습니다.

83년 레버쿠젠으로 이적하고 1년뒤 40만마르크로 올랐지요. 당시 연봉의 50%는 홍콩에서, 나머지는 독일에서 받았어요. 홍콩에서는 비과세였기 때문입니다.

레버쿠젠구단이 바이엘 소속이어서 홍콩에서 급여를 받을수 있었습니다.

40만마르크는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최고연봉이었죠. 83년부터 매년 1억원씩 저축할수 있었어요. "

- 10년간의 독일생활을 청산하고 89년11월 한국에 돌아와 91년 현대 감독을 맡았을때 공언했던 '3년내 우승' 목표는 결국 이루지 못했습니다.

리더쉽 문제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는데요.

"현대 감독에 부임한 첫해 꼴찌팀을 준우승시켰습니다.

그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단장이 교체됐고 팀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 시작되자 선수들이 감독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정몽준회장께서 저에게 전권을 맡겨 좋습니다."

- 기술적인 문제에서 당시 차감독의 기술을 소화할만한 선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까. 이상과 현실이 잘 조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식 이상만 추구한 것은 아닌가요.

"한마디로 거칠고 조잡한 축구가 바로 당시 한국축구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축구는 축구가 아니라고 봤어요. 그게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아닐런지 모르겠군요. "

- 94년말 현대 감독에서 물러난뒤 2년동안 무얼하며 지냈습니까.

"굉장히 바빴어요.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해 유럽으로 많이 돌아다녔어요. 당시 외국기자들도 많이 찾아왔구요. 95년 3월 대통령과 함께 독일에 들어가 월드컵 유치홍보에 발벗고 나섰지요. 또 MBC 월드컵 유치홍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기도 했지요. 언론매체에 칼럼도 연재했습니다.

광고.방송.사인회등 눈코뜰새 없었습니다.

백수시절이 더 바빴나봐요 (웃음) .당시 벌어들인 돈만 해도 현대 감독시절 받은 월급 5백만원보다 더 많았으니까요. "

- 다시 프로팀 감독을 맡으실 의향이 있습니까.

"월드컵이 끝나고 다른 프로팀에서 스카웃을 한다해도 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풍토가 개선되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2년만 쉬고난 뒤 복귀하고도 싶었지만 포기했어요. "

- 부인 오은미씨 (43) 의 헌신적 내조가 화제가 되고 있읍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차감독이 유명한 공처가라는 얘기도 되는데… (웃음) . (인터뷰중 오은미씨는 간간히 차감독의 말을 보충설명하는등 여전히 내조를 했다)

"팬티입고 공차는 것만 제 몫이고 나머지는 모두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통역이자 매니저로 제가 축구에만 전념할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감사할 따름이죠. 한마디로 애인이자 시어머니입니다 (웃음) .결혼할 당시만 해도 축구에 문외한이었는데 지금은 박사예요. 지난달 한.일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을 때는 '너무 긴장을 푼다' 는 충고도 했어요.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는 특히 잔소리가 심해집니다.

그러나 사랑하니까 전화도 하고 조언도 하지요. 제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중요한 얘기를 아내가 해줍니다."

- 독일에 있을때 아이들의 교육은 어떻게 시켰습니까. 한국어는 잊지 않도록 했나요.

"한국어는 별도로 가르치지 않았어요. 그냥 독일어로만 학교생활을 했지요. 그러나 집에 들어오면 한국어를 하게 했지요. 또 제가 기도할 때 한국어로 하니까 자연스레 배우더군요. 물론 한국에 들어와서 정식으로 모국어를 가르쳤읍니다."

- 중학교때 필드하키 선수생활을 했었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축구를 하기 위해 영도중에 입학했으나 곧바로 축구부가 없어지는 바람에 1년동안 필드하키를 했습니다.

이때 체력을 길렀습니다."

- 경신고 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 훈련중 영양실조로 쓰러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어려웠습니까.

"당시야 다 가난했지만 먹고 사는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진학해서 생활할 때 군것질은 엄두도 못냈습니다.

경신고 시절 숙소에서 훈련하다 보니 배가 고팠고 돈이 없어 먹지를 못해 영양실조가 걸렸던 것이죠. "

- 끝으로 차감독 개인의 장기적 목표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월드컵 우승이죠 (웃음) .제가 할수 있으면 좋고 안되면 다음 세대에서라도 월드컵에서 우승하는게 꿈입니다.

귀국 직후부터 시작한 어린이 축구교실을 활성화, 축구클럽을 만들어 '유럽식 모델' 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선수를 키워야 합니다.

유럽식 훈련방법으로 선수를 만들어내면 그런 선수들이 많이 나오는 시점에서 바로 월드컵 우승을 바라볼수 있을 겁니다."

(만난사람=김상국 체육부기자)

[차범근 감독 약력]

▶53년5월21일 경기화성군태안면송산리 출생▶경기화산초등 - 영도중 - 경신중 - 경신고 - 고려대▶72년 국가대표 선발▶76년 공군 (공군축구단) 입대, 3년 만기 (병장) 제대 ▶77년1월7일 오은미씨와 결혼▶79년6월22일 독일분데스리가 (프랑크푸르트) 진출, 연봉 20만마르크▶79~80시즌 첫경기부터 출전, 세번째 경기인 샬케 04전에서 데뷔골 장식▶83년7월 레버쿠젠으로 이적, 1년뒤 연봉 40만마르크로 두배가 오름▶86년 멕시코 월드컵 출전▶88년 레버쿠젠 소속으로 유럽축구선수권대회 바르셀로나 FC와의 결승전에서 동점골을 터뜨려 연장전을 거쳐 승부차기에서 극적인 승리를 이끔 ▶89년11월10일 10년간 독일생활 마치고 금의환향 (통산 3백8게임 출장, 총98골 기록) ▶91년 프로축구단 현대 감독 부임 (계약금 1억5천만원) ▶94년11월26일 현대 감독 해임▶97년1월7일 국가대표팀 감독 취임 (결혼 20주년 기념일) ▶가족 = 부인 오은미 (43) 씨와 큰딸 하나 (19.재수생).두리 (16.배재고 축구선수).세찌 (13.경기초등5년) 등 1남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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