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인 2004년 3월 24일 한나라당은 ‘한나라당’이란 간판을 뗐다. 허허벌판에 천막을 쳤다. 이른바 천막당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시킨 후폭풍이 너무나 거셌다. ‘차떼기당’이란 오명이 너무나 두터웠다. 그해 4·15 총선에서 50석도 못 건질 것이란 예상이 일반적이었다. 막상 투표함을 여니 121석이었다. 한나라당은 84일 만에 천막을 걷었다. 그 사이 나락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5년 전인 2004년 3월 한나라당 소장파들이 당사를 박차고 나와 한강 둔치에 천막을 쳤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에 ‘차떼기당’ 오명을 벗기 위해서였다. 이게 단초가 돼 한나라당은 중소기업전시장 부지의 공터에 천막 당사를 치고 총선을 치렀다. 사진은 불을 밝힌 채 토론을 벌이고 있는 소장파들. [중앙포토]
천막 당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다. 그는 2004년 3월 23일 당 대표로 선출됐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의결에 대한 역풍이 극에 달했을 때였고, 17대 총선(4월 15일)을 불과 22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그는 기존 당사엔 단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았다. “당이 부패 정당, 기득권 정당이란 오명에서 완전히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취임 직후 “다른 건물을 전세 얻는 게 마땅치 않다면 천막이라도 치라고 얘기해 놨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중소기업종합전시장이 있던 여의도의 공터에 천막 당사가 마련됐고, 박 전 대표는 그곳으로 향했다.
“마지막 기회를 달라”는 그의 호소는 빈사의 위기에 있던 한나라당을 살려냈다. 이후 재·보선에서의 연승 기록은 그에게 ‘선거의 여인’이란 닉네임을 안겼다. 이런 활약상 때문에 ‘천막 당사=박근혜’로 연결짓곤 했다.
천막 당사 얘기 이면엔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조역들도 있다.
아이디어는 소장파들로부터 나왔다. 칼바람이 불던 한강 둔치에 천막을 쳤다. 정두언·권영진·정태근 등 당시 원외위원장들이 주도했고, 남경필·권영세·정병국 의원이 힘을 보탰다.
천막 당사로 발전시킨 이는 이상득 당시 사무총장이다. 최병렬 대표까지 물러난 상황이어서 사실상 그는 당 지도부 중 유일하게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장파의 천막을 찾을 때만 해도 천막 당사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후일 “국민에게 그저 잘 보이려고 뭘 해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갔는데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설득이 가슴에 와닿더라”고 토로했다. 이 총장은 정작 천막 당사 시절을 오래 함께하지 않았다. 박근혜 체제가 출범한 뒤 나흘 만에 물러났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가 이 총장을 김형오 의원과 함께 공동선대본부장으로 인선한 직후다. 이 총장은 “지역구 선거에 매진하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주변에선 “선대본부장은 보통 총장 혼자 맡는 게 일반적인데 이 총장과 상의 없이 한 명 더 인선하는 걸 보고 이 총장에게 ‘물러나라’는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여겼다”고 전했다. 부지를 제공한 건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었다. 그는 이 총장의 SOS를 받고 서울시 소유 부지인 500평을 제공키로 했다. 당시 여당에선 “우리가 가건물을 짓겠다고 했을 때 불법이라고 하더니 관권 선거를 하느냐”고 공격했다.
대선 후보 경선이 한창일 무렵엔 천막 당사 행사를 두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2007년 3월 천막 당사 3주년 기념행사가 예정됐을 때였다. 이명박-박근혜 후보 진영 간 갈등이 극심해질 무렵이었다. 이명박 당시 후보 진영에선 돌연한 행사라고 여겼다. “박 전 대표를 위한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 후보는 막상 행사장에서 “천막 정신은 정당사에 없었던 자랑스러운 일”이라며 “천막 정신을 주도했던 박 전 대표에게 박수 한번 치자”고 말했다.
고정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