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금융자율화' 목소리 어디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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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난 22일 은행연합회 14층 회의실. 정부가 혼미를 거듭해온 기아사태의 해법을 법정관리로 공식발표한 후 열린 채권은행장회의는 모처럼 밝은 분위기였다.

은행장들의 얼굴에는 큰 짐을 덜었다는 홀가분한 표정이 역력했다.

회의에 앞서 그간의 경과를 보고한 류시열 (柳時烈) 제일은행장은 "그동안 여러 은행장들의 마음고생이 적지않았다" 며 서로의 상처를 달랜 뒤 " (다행히) 정부가 결단을 내려 기아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고 소회를 피력했다.

김영태 (金英泰) 산업은행 총재는 회의결과를 설명하면서 "정부의 방침에 따라…" 라는 말을 거리낌없이 여러차례 반복했다.

그렇다고 여기에 이의를 달 은행장은 없을 것이다.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장은 다른 자리에서 "진작에 정부가 개입했어야 했다" 며 "어떤 은행장이 혼자서 기아같은 문제를 결정할 수 있었겠느냐" 고 반문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부실기업 처리에 나선 이후 은행권의 분위기는 '기아문제 해결을 반기는 안도감' 을 넘어 '관치금융에 대한 향수' 마저 느끼게 했다.

그동안 외쳐온 '금융자율화' 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정부개입을 한 목소리로 반긴 은행장들은 거꾸로 '자율적으론 어떤 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기아의 법정관리 방침이 발표되기 하루전날 건전기업에 대한 협조융자 '자율' 협약을 결의한 은행장간담회는 한국의 금융현실이 자율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 자리에서 은행장들은 이구동성 (異口同聲) 으로 자율적인 협조의 허구성과 비현실성을 지적했다.

최근의 부도도미노와 금융시장의 위기에는 금융기관간의 불신과 '내몫 찾기' 가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을 은행장들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행끼리 골백번 자율지원결의를 해도 돌아서서는 누구랄 것도 없이 먼저 채권회수에 나서는 상황에선 부실기업뿐만 아니라 멀쩡한 기업도 넘어가기 십상이라는게 스스로의 진단이었다.

결국은 정부가 마지못해 나서서 판을 마련하고 '정답' 을 제시해 줄 때까지 금융기관들이 한 일이라곤 위기를 증폭시킨 것밖에 없었던 셈이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히틀러의 나치독재를 받아들인 독일인들의 심리상태를 '자유로부터의 도피' 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그토록 금융자율화를 외치던 우리 금융기관들이 지금와서 '관치금융' 을 두손 들어 반긴 최근 행태야말로 또하나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가 아닐까 싶다.

김종수<경제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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