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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그때 오늘

일본인보다 더한 친일파 스티븐스를 응징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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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1908년 오늘은 의열투쟁이라는 항일독립운동의 새 장이 열린 날이다. 1904년 10월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는 우리 정부의 동의 없이 일본에 의해 외교고문이 되어 외교권을 앗아갔다. 그는 같은 조선 거주 미국인들조차 “일본 관리들보다도 더 친일적”이라고 비난할 만큼 몸을 사리지 않고 일본에 봉사한 친일파였다.

사진은 1907년께 고종이 외교사절 접견소로 쓰던 덕수궁 수옥헌(漱玉軒·지금의 중명전) 앞에서 스티븐스左와 이토 히로부미가 밀담을 나누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908년 스티븐스에게 당시 미국에서 일고 있던 반일 정서를 달래고 한국 지배의 정당성을 알릴 임무를 맡겼다. 3월 20일자 샌프란시스코 신문에 실린 “일본의 한국 지배가 한국에 유익하다”는 그의 성명서는 현지 교민들의 공분을 샀다.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소속 장인환과 전명운은 “한국에 이완용 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같은 통감이 있는 것이 커다란 행복”이라는 망언에 그를 사살할 마음을 굳혔다.

3월 23일 워싱턴행 횡단열차를 타기 위해 페리 부두에 나타난 그를 겨눠 전 의사가 당긴 방아쇠는 불발에 그쳤다. 서로 뒤엉킨 두 사람을 향해 장인환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총탄 한 발은 전명운의 어깨를 꿰뚫었고, 연이은 두 발에 스티븐스는 숨이 끊어졌다. “뼈에 사무친 원한이 마음에 맺히게 되면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도 주저 없이 행할 것이요, 국가의 공적(公敵)이나 도적을 대하는 데는 공법을 들먹일 여지가 없다.” 이역만리 캘리포니아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장인환이 ‘대동공보’에 밝힌 거사 이유는 정당하다. 당시 미국 신문이 “국민 된 자는 제 나라를 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여야 된다”고 보도할 만큼 미국 사회의 공감도 얻었다. 두 분의 의거는 의병전쟁이 들불 번지듯 전국적으로 활활 타오르게 하였으며, 이토와 이완용의 죗값을 물은 안중근과 이재명의 거사도 촉발하였다.

우리의 의열투쟁은 일제의 군경과 침략에 책임 있는 자들만 응징했다는 점에서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겨냥한 알카에다의 테러행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예멘 자살폭탄 테러는 인류 공통의 양심과 도덕에 어긋나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혹 우리의 언행이 예멘인들의 자긍심을 해치지는 않았는지도 반구저기(反求諸己)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