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 몸 & 맘] 에이즈 환자는 ‘예비 범죄자’가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8면

21세기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정부가 에이즈 환자의 성(性)생활을 관리하는 것이 가능할까.

최근 26세 남성 에이즈 감염 택시기사가 6년간 여성들과 무분별한 성관계를 가진 일이 알려지면서 정부의 에이즈 관리 소홀에 대해 비난이 일고 있다.

전염성을 알면서도 콘돔을 착용하지 않은 채 성관계를 맺은 것은 분명 범죄행위다. 감염자가 확인되면 중상해죄가 적용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 차원에서 감염자의 성생활을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선 현재 6000명이 넘는 감염자를 1대1로 24시간 감시하려면 6000명 이상의 인력이 필요하다. 더 난감한 일은 등록된 감염자보다 실제 감염자가 3배(2~5배)는 된다는 점이다. 이들 2만여 명에 대한 관리는 무슨 수로 할 것인가. 또 철저한 감시·관리를 할 때 초래될 인권침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이즈 감염자는 국가가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해야 하는 예비 범죄자가 아니며, 우리와 다름없는 평범한 시민이라는 점이다. 그저 사랑했던 연인에게서, 수혈을 잘못 받아, 감염자 남편 혹은 아내를 둔 죄로 본인도 모르게 난치병에 걸린 불운한 사람일 뿐이다.

의학적으로 에이즈는 감염자의 혈액·정액·질액 등을 접촉해야 감염되며 일상생활에선 감염되지 않는다.

감염 가능성은 개개인의 면역상태, 환자의 혈중 바이러스 농도, 전파 방식 등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수혈 땐 100%, 바늘에 찔리면 0.3%다. 성관계도 남녀 간 성접촉은 0.1%, 항문 성교 0.8%며, 이 수치는 성기에 궤양이나 상처가 있을 때 증가한다. 또 여성의 감염 가능성은 남성보다 8배 높다.

전염력이 가장 높은 시기는 바이러스가 폭증하는 감염 초기와 말기다. 실제 치료받는 감염자보다 초기·말기 환자의 혈중 바이러스 농도는 1만 배 이상 높다.

의학적으로 가장 위험한 시기는 초기다. 혈중 바이러스 농도는 높지만 혈액검사에선 음성(-)으로 나와, 본인은 감염사실조차 모른 채 타인에게 전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감염 여부는 3주∼3개월 후 항체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다행히 1996년 치료법이 개발된 이후 에이즈는 당뇨·고혈압처럼 만성병이 됐고 전염 위험성도 줄었다. 실제 세 종류의 약을 제대로 복용하면 3~6개월 후부터 혈중 바이러스 농도는 측정이 안 될 정도로 낮아진다. 물론 이때도 바이러스가 림프구에 숨어 있을 뿐 박멸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감염 가능성은 여전히 ‘상존’한다. 따라서 성관계 땐 콘돔을 써야 한다.

치료제 개발 이후 감염자의 생존기간은 20년 이상으로 늘어났다. 자연 국내 에이즈 감염자 수도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당국이 진정 에이즈 퇴치를 원한다면 환자에 대한 감시·감독보다는 지속적인 예방교육에 힘쓰면서 감염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래야 감염자가 음지에 숨어 보복성 성관계를 맺는 식의 문제를 줄일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에이즈 없는(without AIDS) 사회가 아닌, 에이즈 환자와 더불어(with AIDS) 사는 사회를 목표로 삼아야 할 시점이다.

91년 에이즈 감염 사실을 언론에 공개한 뒤 사업가로 변신해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미국의 농구 스타 매직 존슨. 그는 에이즈와 더불어 사는 사회의 좋은 모델이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