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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멀리, 푸르스름하게 동트는 지평선 위로 등에 날개가 달린 원숭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마리로 보이는 그것들은 저공 비행을 하는 편대처럼 일정한 대형을 갖추고 날아오고 있었다.

중요한 인물을 호위하듯 중심을 에워싸고 둥글게 둥글게, 이제 막 터져 오르는 박명을 배경으로 장관을 이룬 그것들을 나는 놀라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극히 짧은 파장처럼 기대감과 설렘, 그리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무시로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아. 거기, 편대를 이룬 듯한 중심부에서 강렬한 광채가 쏟아지는걸 보면서 나는 깊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가 서 있는 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했을때, 난 중심부를 날고 있는 한 마리의 황금빛 원숭이와 그것의 등에 올라앉아 연해 내게 손을 흔들고 있는 한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미랑, 하고 나는 다시 한번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녀가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직후부터 원숭이들의 선회를 따라 돌며 정신없이 허공을 향해 손짓을 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원숭이들은 지상으로 내려앉지 않았고, 그것들을 따라 도는 맴돌이로 인해 나는 점점 더 깊은 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기이한 착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황금빛 원숭이 등에 올라앉은 여자의 얼굴, 그것이 한차례의 맴돌이가 끝날 때마다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하곤 한 것이었다.

이미랑.이예린.윤하영, 그리고 가면의 여자…. 이윽고 어지럼증을 참지 못하고 나는 선 자리에서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한동안 모든 것을 체념한 심정으로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때 놀랍게도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날개 달린 원숭이들.이미랑.이예린.윤하영, 그리고 가면의 여자까지, 내가 올려다보는 허공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순간 뒤에 나는 1503호, 그러니까 은미와 영우가 동거를 하는 공간에 누워 있는 내자신을 발견했다.

오, 하느님 맙소사!

이제는 내 자신이 한 마리 날개 달린 원숭이가 되어 1503호의 침대에 누워 있는 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줄무늬의 시트가 덮인 침대 위에서 나는 알몸이 된 은미의 몸을 정신없이 탐닉하고 있었다.

실내의 구석진 어둠 속에서 영우가 표정없는 얼굴로 은미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은미를 안고 있는 나는 그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날개 달린 원숭이가 된 나는 그것을 전체적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은미는 내 머리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고 있었고, 그것이 내 영혼의 무덤이라도 되는 양 나는 정신없이 그녀에게 굴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석진 어둠속에 서 있던 영우가 창백한 얼굴로 걸어와 내 등에 손을 댔을때…헉, 하고 기도가 막히는 소리를 내지르며 나는 기급하듯 잠에서 깨어났다. “영원한 사랑의 궁전. ” “아니, 불멸을 닮아가는 어리석은 순수. ” “그럼 이제 에메랄드 궁전의 문을 열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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