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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코리아의 피는 사내들도 흐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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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호 24면

12일 현재 세계 랭킹 100위 이내의 한국 또는 한국계 남자 골퍼는 2명이다. 앤서니 김(24·한국이름 김하진)이 11위, 최경주(39)가 21위다. 실제 위상은 드러난 수치보다 높다. 세계 랭킹은 지난 2년간의 성적을 합산해 산출하는데 이 통계는 최근 한국 남자 골프의 상승 기류를 아직 완전히 반영하지 못했다.

최경주, 앤서니 김 이어 양용은도 PGA 우승

프로골퍼라면 꼭 한번 나가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인 마스터스 출전 선수의 수가 더 정확한 지표가 될 수 있다. 올해 마스터스에 한국계는 최경주, 양용은, 앤서니 김과 아마추어인 대니 리(19·한국이름 이진명)까지 4명이 나간다. 마스터스는 출전 선수가 100명이 채 안 되는데 그중 4명이 한국의 혈통이다.

올 시즌 골프의 메이저리그인 미국 PGA투어에서 활동하는 한국 혹은 한국계 선수는 6명이다. 1999년 최경주를 시작으로 2004년 나상욱(26)과 2007년 위창수(37), 앤서니 김이 PGA투어에 뛰어들었다. 2008년 양용은과 올해 재미교포 제임스 오(27·한국이름 오승준)가 합류했다.

양용은의 우승은 한국계 선수의 미국 PGA투어 통산 10승째다. 최경주가 7승, 앤서니 김이 2승, 양용은이 1승을 보탰는데 앞으로 더 많은 선수에게서 우승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경주와 앤서니 김은 일반 대회가 아니라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할 실력을 갖추고 있다.

최근 나상욱도 기세가 좋다. FBR 오픈 3위 등 올 시즌 톱 5에 세 차례나 들었기 때문에 우승이 머잖아 보인다. 5년 전 PGA 투어 최연소 선수로 주목받다가 손뼈가 부러져 몇 년간 슬럼프에 빠졌으나 서서히 제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위창수도 양용은이 우승한 혼다 클래식에서 9위에 오르면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골프의 또 다른 메이저리그인 유러피언 투어에서도 한국 선수들의 활약은 점점 커지고 있다. 2월 12일 열린 말레이시안 오픈 1라운드에서 한국의 10대인 노승열(18)이 10언더파 62타를 쳐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우승자는 재미교포인 앤서니 강(37)이었다. 그 다음주 열린 조니워커 클래식에선 또 다른 한국계 10대가 우승해 파란을 일으켰다. 뉴질랜드 교포인 대니 리다.

대니 리는 세계 최고가 될 재목이다. 타이거 우즈에게 맞설 선수로 꼽히는 앤서니 김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 앤서니 김처럼 샷 거리가 300야드를 훌쩍 넘고 아이언샷에도 힘과 스핀이 실려 딱딱한 그린에서도 공을 세운다. 투수로 치면 강속구를 던지는 정통파 투수다. 대니 리는 지난해 US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우즈의 최연소 우승 기록을 깼으며 어니 엘스·우즈를 이어 조니워커 클래식 챔피언이 되면서 실력을 확인했다.

한국 혈통의 남자 선수들이 선전하고 있지만 여자와의 차이는 아직도 크다. 여자 골프 세계 랭킹 100위 이내 한국 또는 한국계 선수는 남자의 18배에 이르는 36명이다. 한국 여성 골프는 되고 남자는 잘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다양했다.

가장 흔한 분석은 한국 여성 우월론이다. 원래 한국 여자들이 생명력이 강한 데다 손재주가 좋아 특히 골프에 강하다는 설명이다. 생활력이 강한 한국 여성은 일반적으로 국제 대회에서 한국 남성보다 좋은 성적을 냈고 젓가락질과 바느질 등으로 손재주가 좋아 퍼팅과 쇼트게임 감각이 뛰어나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증명된 것은 아니다. 요즘 한국 여성은 바느질을 별로 하지 않으며 한국 남자가 젓가락을 버리고 포크를 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은근과 끈기는 남녀불문이다.

이런 여성 우월론보다 여자 골프가 남자에 비해 국제 무대에서 선수층이 상대적으로 얇다는 것이 더 정확한 분석으로 보인다. 외국에서는 프로 선수가 되려고 운동하는 여성이 그리 많지 않다. 남자 스포츠에 비해 여자 스포츠는 상대적으로 블루 오션이다.

특히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공을 쳐야 하는 골프에 서양 소녀들은 심드렁하다. 미국의 여자 주니어대회에 가 보면 아시아계가 많고 상위권은 한국 혹은 한국계가 거의 장악한 상태다. 카리 웹은 남성 골프 스타가 많은 호주에서 여자 선수가 적은 이유에 대해 “호주에선 골프를 여성 스포츠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박세리의 영향으로 한국에선 골프가 ‘여자가 하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종목’으로 인식된다. 세계 정복을 노리며 어려서부터 프로처럼 훈련하는 여자 선수가 많다.

한국 남성의 기를 죽이는 분석도 나온다. 힘으로 승부하는 남자 골프에서 한국 선수들은 샷 거리가 짧아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 PGA투어에서 최경주는 드라이브샷 평균 거리에서 138위(277야드), 국내에서 장타로 이름을 날렸던 양용은도 122위(280야드)에 불과해 한국 선수들이 전반적으로 샷이 짧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짧은 샷 거리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한국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7승이나 거둔 최경주는 거리가 골프의 전부가 아니란 걸 증명했다. 앤서니 김이나 대니 리, 이원준은 300야드를 간단히 넘기는 장타자다. 캘러웨이 수석 디자이너인 로저 클리블랜드는 배상문을 보고 “샷 거리가 필 미켈슨과 비슷하다”면서 “‘동양 사람은 샷 거리가 짧다’는 것은 이제 낡은 편견”이라고 말했다.

외부 여건은 확실히 여자가 좋다. 박세리의 영향으로 한국에선 여자 골프의 인기가 남자 골프보다 높다. 당연히 스폰서가 많다. 큰 꿈을 안고 해외에 진출할 여건이 여성 선수에게 더 열려 있다. 또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치열한 경쟁을 거치면서 자랐고 언니들처럼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높다. 그러나 이것으로 커다란 여남 격차를 모두 다 설명할 수는 없다. 흥미로운 가설이 나온다. 한국의 지극 정성 골프 대디 문화가 여자 선수들에겐 긍정적이지만 남자 선수들에겐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했다는 이론이다.

청소년기나 성년기가 되면 사내 아이는 이것저것 간섭하는 극성스러운 아버지에게서 독립하려고 한다. 물론 딸도 아버지와 갈등이 일어나곤 하지만 여성의 유전자는 관계를 중시하고 타협하는 쪽을 택한다.

최나연의 아버지 최병호씨는 “남자 선수들은 스무 살 전후로 아버지랑 떨어지지만 여자 선수들은 20대 중반까지는 그냥 같이 간다”고 말했다. 아버지에게서 독립한 아들이 홀로 서기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유망주였던 한 선수는 “코스 전략부터 퍼팅 라인까지 아버지가 다 결정해 줬기 때문에 아버지와 떨어져 혼자 경기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경주와 양용은의 성공을 보면 이 가설은 일리가 있다. 최경주와 양용은의 성공 비결은 키는 크지 않지만 타고난 강골이고 촌에서 자란 덕에 황소처럼 우직하며 두둑한 배짱과 신념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들이 자신들보다 10년이나 먼저 골프에 대한 감각을 키우고 비싼 골프 레슨을 받으면서 자란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한국 선수 중 정상에 올랐다는 것을 설명하긴 미흡하다.

골프 대디의 영향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성공비결일 수도 있다. 스무 살이 다 돼서 골프를 시작한 최경주는 “처음 골프를 할 때 아버지는 골프가 뭔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양용은도 사정이 비슷하다.

요즘은 이 가설도 과거의 얘기가 되는 것 같다. 요즘 주니어 골퍼의 부모들은 얼 우즈가 아들 타이거를 키운 양육법까지도 연구한다. 선배 골프 대디들처럼 자식을 닦달하지 않고 꿈과 이상을 준다. 골프 기계가 아니라 타이거 우즈 같은 뛰어난 정신력을 가진 선수로 키우고 있다. 양용은의 우승은 시작에 불과하다. 더 훌륭한 물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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