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신문은 진화해야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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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근대 신문의 발행 역사가 서구에 비해 짧은 한국에서도 신문은 다양한 용도로 서민 생활에 일조했다. 다 보고 난 신문은 빠짐없이 차곡차곡 반듯하게 접어 보관했다가 두루 썼다. 휴지가 귀하던 시절, 신문지를 여러 등분으로 잘라 화장실에 걸어놓는 집이 많았다. 철 따라 장롱을 정리할 때 옷 사이사이에 넣으면 방충제가 필요 없었다. 동네 정육점에서는 포장지로, 찢어지게 가난한 오두막에선 벽지로 썼다. 학교에서 폐품을 모을 때 신문지는 빈 병과 함께 환영받는 품목이었다. 습기 제거 용도로는 지금도 최고다. 어떤 이에게는 구질구질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한국 신문의 추억은 이런 시시콜콜함을 빼놓으면 아쉽다. 그만큼 신문이 독자들 가까이에서 친밀했다고나 할까.

이 궁핍했던 시절이 차라리 한국 신문의 전성기였다는 건 아이러니다. 30~40면 두툼한 요즘 신문 면수에 비하면 초라하고 빈약하기 짝이 없던 8면이나 16면을 내던 때, 독자들은 구석에 처박혀 있던 단신 하나, 광고 한 줄까지 꼼꼼하게 읽어내려 애썼다. ‘행간(行間)을 읽는다’는 은유가 통하던 연대였다. 소설가 공지영씨는 2007년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1970~80년대 학창시절 신문을 볼 때 검열 때문에 기사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기자가 정말 쓰고 싶었고 전하고자 했던 내용을 헤아려 읽는 경우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일종의 내밀한 공감과 공모 의식이 기자와 독자를 하나로 묶고 있던 때다.

세월의 야속함을 탓해야 할까. 종이 신문은 사라지는 중이고, 신문기자는 유통 기한이 지났다는 풍문이 떠돈 지 오래다. 미디어에 대한 신뢰도는 급추락하고 있고 신문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싸늘하다 못해 적의에 차 있다는 보고도 나온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저널리즘스쿨 교수인 새뮤얼 프리드먼은 “기자란 말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콘텐트 공급자’로 바뀌어 불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저널리즘이 마치 엄살이라도 부리듯이 죽어가는 척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되묻는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얼굴 하나가 있다. 2005년 3월 9일 24년 동안 진행해온 저녁뉴스를 끝으로 미국 CBS 방송의 간판 앵커 자리를 떠난 댄 래더다. 보수 진영으로부터 ‘진보적 편견을 가진 대표 언론인’으로 꼽혀 비난받았지만 일반 시민들로부터는 신뢰받았던 그가 프로를 마치며 남긴 마지막 말은 “용기를 가져라”였다. 동료들은 래더에게 “공공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언론인의) 기회는 보기 드문 특권이라는 생각에 누구보다 투철했던 기자”라는 찬사를 보냈다.

어제와 그제 본지는 14년 전 1면 프런트 페이지를 덧씌운 일종의 래핑 신문을 독자에게 보냈다. 12일자 1면 래핑은 세로쓰기 지면에 시커먼 동판으로 뜬 한자 제목이 우악스러워 보였고, 13일자의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 가로쓰기 편집으로 바뀐 것이었지만 여전히 촌티가 났다. 편집국에 빗발친 문의 전화에서 독자들은 불과 14년 전 신문이 그 꼴이었느냐는 반응이었다. 오랫동안 일본 신문의 형식과 제작방식을 좇아온 한국 신문에 대한 뒤늦은 질타라 할 수 있다. “옛날엔 그렇게 정치 기사가 많았구나 싶었다”는 한 정치인의 반응은 탄식처럼 들렸다. “오늘자 신문도 후일에는 그런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고은 시인의 지적은 신문도 쉼 없이 진화해야 함을 일깨워 주었다. 래더가 그랬듯 진화는 기자의 특권이기도 하다.

한때 거리를 누비며 목마른 국민의 알 권리를 달래주던 신문배달 소년은 조각상(사진)에만 남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수십 년 한국 신문의 정형으로 여겨져 온 대판 신문도 이제 역사의 그늘로 들어서는 중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꿔야 할까.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겠는가.

정재숙 문화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