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칼럼]동남아 통화위기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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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7월 이후 말레이시아의 링깃은 달러 대비 24%, 태국의 바트는 무려 40% 하락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분통 터지는 일이다.

"강대국들 (실제로 미국을 겨냥) 이 개발도상국들을 길들이기 위해 통화위기를 조장했다" 는 모하메드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의 주장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외환투기는 부도덕한 일이기 때문에 불법화하자" 든가 "국가변란죄로 다스리겠다" 고 나서는 것은 지나친 것같다.

동남아 각국의 경제운용에 문제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켜 외국 자금을 끌어들인 것까지는 좋았으나 과잉자금이 부동산 투기등으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둔 것은 실수였다.

달러가 강세로 돌아서자 숨어 있던 문제들이 드러났다.

태국의 경우 94년 22.2%, 95년 24.7%에 이르렀던 수출 증가율은 96년 - 1.8%로 곤두박질쳤다.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금리를 올리자 경기는 더욱 가파른 하향곡선을 그렸고 은행은 부실채권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핫머니가 그대로 둘리 만무했다.

지금 와서 고정환율제를 비난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통화가치의 안정이 없었다면 그렇게 많은 외국 자본이 유입되지 않았을 것이며 연 8% 이상의 높은 경제성장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제는 정부의 적절한 감독기능, 특히 효율적인 금융시스템의 부재에 있었다.

조기경보체제를 가동하고 몇개의 부실징후 금융기관을 본보기로 문닫게 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취했더라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조지 소로스를 국제금융시장의 '경찰 (cop)' 로 부르는 오만함의 배경엔 정부의 실패를 교정한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준비없는 개방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방을 경계하는 말이 아니라 개방을 하되 건전한 정부재정, 낮은 인플레이션, 적정범위내의 경상적자, 효율적인 금융시장, 그리고 균형잡힌 경제구조등을 갖추라는 충고다.

정부는 '원화는 안전하다' 고만 되뇔 것이 아니라 개방에 맞는 차원높은 위기대응및 관리기술을 선보여야 한다.

당면하고 있는 경제및 금융위기를 3개월치 수입대금에 불과한 외환보유고에 기댈 것이 아니라 국제통화기금 (IMF) 의 막강한 자금력과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의 회원권을 담보로 해결하는 방법은 없을까. '크게 놀아보자' 는 것이다.

IMF는 2년전 멕시코사태 때에도, 이번 동남아 통화위기 때도 어김없이 달려왔음을 기억하자. 위기에 걸맞은 비전과 배짱.정교함이 필요한 때다.

권성철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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