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과학기술과 대선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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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 대선이 가까워오면서 후보들이 언론에도 자주 등장하고 여러가지 말도 많이 하고 다닌다.

그런데 그 말들이 대부분 아무 내용이 없거나 내용이 있더라도 근거가 빈약한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민주국가의 정치제도에 대해서는 이미 정치학자들이 그 장단점을 명확히 분석해 놓았으련만 이 시점에 왜 우리나라에서 내각제 실시가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고 단지 언제까지 해야 된다는 말만 무성하다.

기아사태에 대해서도 '잘 해결해야 한다' 는 말만 되풀이하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묵묵부답이다.

사실 일반 국민이 후보들의 기아대책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개별 기업의 생사문제보다 앞으로 그 후보가 집권했을 때 어떤 원칙으로 우리나라 경제를 운영할지 그 밑그림에 대해 알아보자는 욕구가 크다.

그러나 대선 후보들은 일관된 원칙이나 신념에 입각해 의견을 내놓기보다 단지 표 계산에 따라 말이 달라진다는 느낌이다.

후보들이 국가 경영에 대한 밑그림을 보여주지 못하면 언론을 비롯한 여론 지도층이라도 추궁해야 하는데 그마저 부실한 형편이다.

그 많은 TV토론에서 과학기술이나 정보화에 대한 심도있는 질문이 없었다는 점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외국의 예를 보면 미국 앨 고어 부통령은 '정보고속도로' 를 오래 전부터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하고 있고,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도 과학기술과 교육을 강조하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어느 나라나 정보고속도로 건설 또는 과학기술진흥 정책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익받는 유권자층은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국가경영의 중요한 밑바탕이라는 것을 꿰뚫어 본 정치지도자의 비전과 신념이 많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반면 지금 우리 후보들에게 과학기술에 관한 의견을 묻는다면 아마도 "국가경제를 위해 투자와 지원을 늘려 과학기술 진흥에 힘쓰겠다" 는 식의 판에 박힌 모범답안만 되풀이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제 과학기술은 경제발전의 도구로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 분야 전문가들만을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과학기술이 국민의 일상생활과 정치.사회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의 몇가지 예만 보더라도 미국산 수입쇠고기에서의 O - 157균 검출에 대한 미국측의 대응자세가 자칫 한.미간의 감정싸움으로 비화할 위험성마저 보이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검역기술에 대한 미국측의 불신이 한 원인이다.

국민의 세금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환경오염의 골칫덩이만 남겨준 시화호 (始華湖) 사업은 기획단계에서 과학기술적 환경평가만 제대로 했어도 막을 수 있는 인재 (人災) 였다.

또한 이제는 계속 추진할 수도, 안 할 수도 없게 돼버린 경부고속철도사업도 초기단계에서 기술적 평가를 소홀히 한 채 정치적 판단만으로 밀어붙였기에 얻게 된 온 국민의 애물단지다.

이제는 정부의 여러 사업중 과학기술이 직.간접으로 연관되지 않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다.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될 것이고, 특히 대규모 국책사업에는 모두 첨단기술이 관련돼 초기단계부터 기술적 판단이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선 정부의 모든 부처에 과학기술적 정신이 확산돼야 한다.

즉 온 정부의 과학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미 정부의 실무자들은 필요성을 깨닫고 부처별로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나름대로 힘을 기울이고 있다.

10여년전만 해도 과학기술처에서 거의 독점하던 정부의 연구개발사업에 지금은 무려 17개 부.처.청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가 조직적이지 못해 제2의 시화호나 경부고속철도사업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점이 문제다.

이 점은 국가통치 차원에서 행정조직의 적절한 개혁이 이루어져야만 해결될 사안이다.

이처럼 시대는 변해가고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은 쌓여있는데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기는 커녕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아마도 쓸데없는 이합집산과 세력다툼에 정신 파느라 세계를 움직이는 커다란 흐름을 놓쳐버린 듯하다.

그러니 지역감정에나 기대고 남의 약점이나 캐면서 이익집단의 눈치를 보는 얄팍한 공약만 남발하는 것이 아닌가.

오세정 <포항공대 방문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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