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앞둔 무차별 민원 실태…지자체장들 앞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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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달 24일. 신한국당의 대표실과 정책위에는 이날만도 30건에 가까운 각종 민원이 밀려들었다.

축산물 가공업무를 농림부로 일원화해 달라는 축협의 주문, 취학 1년전 어린이 교육지원을 유치원에서 유아원으로 확대해 달라는 건의등…. 그 중 제주도에서 팩스로 날아온 두건의 정책민원이 눈길을 끌었다.

하나는 무소속인 신구범 (愼久範) 제주지사가 제주종합개발사업투자.국고보조사업.지역현안사업등의 지원요청을 해온 것. 다른 하나는 지난 단체장선거 당시 민자당후보였던 우근민 (禹瑾敏) 전제주지사가 보내온 '개발과 보전을 조화시킨 제주개발계획' 이다.

최근 각 정당에 쏟아지는 정책민원의 상당부분은 이렇듯 자치단체측과 당소속 자치단체 인사들의 '요구' 인 게 특징. 지방자치가 도입된뒤 치르는 첫 대선에서 새로이 나타나는 양상이다.

대선직후 바로 선거 (98년6월) 를 치러야 할 단체장.예비후보들로서는 이번 대선이 차기당선에 필요한 '한건' 을 남길 절호의 기회. 더구나 예산국회까지 겹쳐 있는 마당이다.

비단 제주뿐 아니라 충남 (백제권 개발사업).경남 (김해 輕전철사업.진주광역권 개발).전남 (2010년 해양엑스포유치) 등 각 도 (道)에서는 각 정당후보를 '볼모' 로 한 숙원사업 해결에 대대적으로 나서고 있다.

각 정당들도 무소속 단체장 영입경쟁이 붙은 상황이라 나중에야 어찌되든 민원채택 선심을 쓰고 있다.

이런 것들은 대가라는 측면에서 단체장의 불법 선거운동을 부추기는 부작용 우려까지 낳고 있다.

하부 자치단체와 기관.직능단체들도 호기를 놓칠세라 후보들에게 목청을 높여가고 있다.

진주상공회의소는 사천국제공항 승격등 18개항의 개발사업을 대선공약에 반영해 달라고 여야 4당후보에게 요구했다.

5자 구도로 결과예측이 어려운 대선정국의 흐름도 여야를 막론한 민원홍수사태를 부추긴다.

국민회의측에는 특히 부산가덕도 신항 공사에 따른 어업권 피해보상, 안동댐~영일만 도수로공사관련 피해보상등 영남측 주민들의 집단민원이 폭주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영남표' 에 생각이 있으면 잘해 보라는 식이다.

해당 자치단체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상대당에 '해결' 을 요구하는 새 현상까지 등장한 것이다.

민원뿐 아니라 문학회.××종파 창립기념식등 각당 후보에 대한 행사참석요청들도 폭증하고 있다.

선거법이 강화되자 행사의 예산내역서를 첨부해 은근히 돈지원을 요구하는 경우도 흔하다.

대부분 "다른 당 후보는 오니 알아서 참석해달라" 는 것이어서 각 정당측은 상대당에 참석여부를 서로 확인한뒤 다른 정당 몰래 후보부인이 참석, 성의를 표시하는 해프닝도 잇따르고 있다.

민원중에는 주일 시험시행을 둘러싼 기독교계와 불교계의 입장, 특급호텔과 비특급호텔간의 예식장 인.허가 신경전, 남자들의 미용실출입 규정을 둘러싼 이.미용업계의 시각등 자칫 양측 갈등의 도화선이 될 거리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각 정당들은 대부분의 요구에 "처리해줄테니 기다리라" 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일쑤다.

더구나 본격적인 대선운동에 들어가면 접수된 각종 민원이 대선득표 차원에서 당의 공약으로 버젓이 확대재생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벌써 각당이 1차로 내놓은 교육.중소기업.농어촌 공약의 상당부분은 실현불가능한 공약 (空約) 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숙명여대 박재창 (朴載昌.행정학) 교수는 "다양한 시민사회의 요구를 정치권이 수용해 처리하는 과정 자체를 배제할 수는 없다" 며 "그러나 표만을 의식한 무차별 공약내놓기는 시민단체와 언론의 철저한 검증이 뒤따라야 한다" 고 강조했다.

전국부종합·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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