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산너머 남촌엔 누가 살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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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프랑스어에는 알파벳 아래위에 붙이는 점들이 유난히 많다.

악상테귀니 악상그라브니 하는 이 점들이 발음에 작용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대개는 단어들이 형성돼 온 과정에서 이런저런 경위로 붙었다가 관습으로 그냥 남아 있는 것이다.

외국인뿐 아니라 프랑스인들도 이 악상 (accent) 때문에 정확한 철자법을 익히는 데 애를 먹는다니 원래 기능은 사라진 채 맹장염만 일으키는 충수돌기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십여년 전 프랑스 문화부는 발음상의 기능을 갖지 않은 악상을 표준철자법에서 대거 제외하는 조치를 취했다.

대부분의 악상은 표시하든 표시하지 않든 철자법에 모두 맞는다고 보기로 한 것이다.

고유문화에 유별난 자부심을 가진 프랑스 문화인들이 가만 있을 리 없다.

수많은 학자.문인들이 이 조치를 '문화적 자살행위' 라 비난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정부측 반응이 재미있다.

벌떼 같은 항의는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라며 문화부장관이 감사를 표했다.

악상이 불편하더라도 우리 것을 아끼는 게 우리 문화의 본질을 지키고 키우는 길이니, 문화의 가치를 깊이 이해하는 여러분의 글에는 악상을 꾸준히 써서 우리 문화의 본질을 잘 지켜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다만 문화와 관계없이 실용적인 목적으로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에게까지 악상의 철저한 사용을 강요하지는 않겠다고 덧붙였다.

철자법에 대한 프랑스 문화부의 유연한 자세가 신선하게 느껴진 것은 표준맞춤법의 구속력을 비교적 강하게 느끼는 우리 문화풍토와의 대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창제 (創製) 뒤에도 수백년간 '언문' 이라 멸시받고, 왕조시대가 끝나고 국민국가시대가 되어 겨우 제 구실을 할 만 하자 일제의 탄압을 받아야 했던 한글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 표준을 확고하게 세우는 것이 해방 후 우리의 국가적 과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표준어의 뼈대가 웬만큼 굳어진 이제는 더 유연하고 포용적인 언어관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표준어를 키워 온 남북의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절실한 일이다.

바른말 보급을 위한 TV 공익프로그램에서 노랫말에도 많이 나오는 '~길래' 를 '~기에' 로 고쳐야 한다는 내용을 보며 지나친 획일주의는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

맞춤법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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