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유럽 선거인프라를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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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와 국민의 관계에서 볼 때 민주주의의 요체는 대의성과 책임성의 조화에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가 요즘 그 발상지인 유럽에서조차 예전처럼 잘 돌아가고 있지 않는 것같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날카롭게 간파한대로 제아무리 완전한 정치제도도 시간의 흐름속에서 썩게 마련이기 때문일까. 중앙일보가 주관한 선거제도 인프라 시찰단 일원으로 유럽을 다녀왔다.

주지하다시피 영국.프랑스.독일은 대의민주주의가 만개돼 있는 나라들이다.

대의민주주의의 하부구조로서 선거제도는 잘 기능하고 있다.

이곳에서 선거구 획정과정에서의 여야간 게리맨더링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또한 방송매체를 통한 선거운동이 보편화돼 있어 자랑거리도 아니다.

후보는 굳이 유권자를 찾아 다니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시민들의 초대에 따라 출마자는 자신의 정책과 공약을 제시하면 된다.

당연히 선거는 당원보다 지지자에 의해 쟁점을 중심으로 치러지게 마련이다.

우리처럼 금권이나 관권의 개입 소지는 원천적으로 제거돼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과거에 선거부패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국가중에서도 민주주의의 할아버지격인 영국의 경우 유권자 매수와 향응은 1백여년전까지만 해도 비일비재했다.

사실 이들이 오늘의 공명정대한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의 모범이 되기까지 선거관련 법과 제도의 과감한 개혁 뿐만 아니라 국민과 정치인의 뼈를 깎는 각성을 통해 선거풍토와 문화의 혁신이 이뤄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선거공영제는 거의 완벽에 가깝게 실행되고 있다.

돈 많이 쓰는 후보는 바보다.

법정 선거비용을 초과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지만 프랑스와 같이 상한액이 제일 높은 경우에도 8천만원을 넘을 수 없다.

정치자금의 투명성은 철저한 공개주의와 회계감사아래 지켜지고 있다.

특히 정경유착을 막기 위해 기업으로부터의 기부금은 원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독일 선거제도의 특색은 정당명부식 투표제에 있다.

유권자가 한표는 후보자에게, 다른 한표는 정당에 투표함으로써 소선거구제의 약점인 승자독식 (勝者獨食) 을 방지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나 5%미만의 득표를 한 정당은 의석배정에서 배제함으로써 군소정당 난립의 차단을 시도하고 있다.

프랑스는 다당제아래 소선거구제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2회 투표제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 자못 색다르다.

바로 2차투표에서 주요 정당을 중심으로 좌우정렬이 이뤄진다.

영국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단순 다수투표제를 채택하고 있으나 소선거구제가 지니는 대표성 문제로 인해 비례대표제를 포함한 선거제도의 개편을 준비중에 있다.

유럽 나라들은 작금 예외없이 정당난립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정당난립은 사회분화의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지만 정부의 책임정치 구현에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프랑스의 좌.우파 동거 (同居) 정부가 집권이후 가져오는 정책혼란이나 독일의 연합정부가 지니는 권력제휴적 속성으로 인한 합의정치의 쇠퇴가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문민의 위기' 를 맞이하고 있다.

대통령을 탐하는 정치인은 많아도 나라를 구하려는 정치가가 별로 없다.

승패와 명리가 원칙과 도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민주주의의 특징이라 할 다양성속의 조화가 혼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더욱이 여야정당이 권력구조 문제를 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음은 한심한 일이다.

서구는 지난날 대중적 국민정당이란 바탕위에서 국가마다 특색있는 정부형태를 마련해 왔다.

그러나 우리의 정당은 1인 보스 중심의 지역에 기반한 사당 (私黨)에 불과하다.

그런데 캐치올 파티 (중도통합정당) 흉내에다 그것도 모자라 정권교체니 세대교체니 하는 명분아래 권력장악을 위한 집권시나리오 만들기에 바쁘니 적이 서글픈 일이다.

대체 이 나라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임현진 <서울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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