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서평]'러셀 역설과 과학혁명구조' 김상일 지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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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김상일교수 (한신대.철학)가 '러셀 역설과 과학혁명 구조' 를 펴냈다 (솔刊) .아주 모험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러셀의 역설이란 "무엇이면서 동시에 무엇이 아닌 상황" 을 말하는 것이다.

20세기초 러셀이 수학의 집합론에서 이런 현상을 발견했다해서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이고 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크레타섬에 살았던 시인 에피메니데스의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 라는 진술을 예로 들면서 러셀의 역설을 조명한다.

이 말을 한 에피메니데스는 크레타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진술이 참말이라면 그도 거짓말쟁이가 되고 그가 한 말도 거짓말이 된다.

또 그의 진술이 거짓말이라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 라는 말을 뒷받침하게 된다.

그가 한 말이 참말일 경우 그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 되어버리는 논리의 꼬임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논리순환은 무한대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러셀은 이러한 패러독스의 문제가 수학의 집합론에서도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런 악순환을 병적인 것으로 보았고 치료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저자는 러셀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 "무엇이면서 동시에 무엇이 아닌 상황" 을 거부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분법적 형식 논리의 한계를 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한다.

실제로 동양사상에서 주역의 음양 사상, 물질과 정신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불교의 불일불이 (不一不異) 사상,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한다는 노자의 유무상통사상 등은 모두 일종의 역설 논리에 속한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말하는 시공의 상대성,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 위치 - 속도 (운동량) 의 불확정성, 혼돈이론에서의 무질서 속의 질서의 혼돈 현상, 생명현상에서의 전체와 부분의 자기조직계 등 무수한 역설적 체계들이 있다.

이들 현대 신과학은 역설의 논리선상에서 동양사상과 만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 신과학 분야의 이론체계들이 다분히 역설적 구조에서 이해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형식논리와 인과적 결정론에 얽매여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측면을 과감하게 일깨우려 하고 있다.

사실상 오늘의 신과학 운동은 이러한 차원에서 전체 사상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합리적인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사실 저자의 시도는 대단히 모험적인 것이다.

러셀의 역설을 과연 그렇게 확대해석할 수 있느냐 하는 면과 반면 기존의 형식논리를 깰 수 있는 과감한 도전이라는 양면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속에 너무 많은 과학이론을 등장시키고 있다.

그래서 수학의 기초론을 비롯해서 여러 과학이론들을 충분히 다듬지 못하고 있다.

또 수학의 기초이론들을 총망라하고 있는데 러셀의 역설을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면 이 책을 이해하는데 좀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많은 노력이 따른 저서임은 분명하다.

사실 역설을 잘못 받아들이면 궤변이 될 위험이 있다.

즉 역설을 과다하게 확대하여 현대과학의 복잡한 체계와 이론에 연결시키다 보면 본의 아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에 대해서는 아마도 저자가 후속저작에서 밝힐 것으로 본다.

김용정 명예교수 (동국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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